아이유 (2010.12.09)
내게 왜 이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오늘 했던 모든 말 저 하늘 위로
한 번도 못했던 말
2010년의 끝자락인 12월에 발매된 이 노래는 2011년이 되어서야 빛을 보았다. 남성들의 로망이었던 아이유. 아이유의 <좋은 날>을 기록한 수줍은 이유에 대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하겠다. 자취방 룸메이트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부끄러운 비밀에 대해서.
L과의 관계가 좋아질수록 난 서서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모적으로나 취향으로나 외향으로나 모두 아이유 같았다. 주변에 친했던 한두 명은 그녀를 짝사랑하며 힘들어했다. 그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나의 몫. 술에 취한 그 친구들이 내 휴대폰으로 L에게 한 번만 전화해주면 안 되냐며 나를 보챌 때마다, 난 더욱더 진심을 발설할 수 없었다. 만약, 참다못해 진심을 내비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00%의 거절. 어색하고 불편한 눈 마주침. 그녀와의 멀어진 거리. 사진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것. 동기생들의 놀림감. 새로운 포지셔닝의 실패 등 상상만 해봐도 끔찍하고 아찔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았다. 난 확실한 게임이 아니면 절대 베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간혹 튀어 오르는 미묘한 감정들은 거절의 그 순간을 스스로 상상하면서 냉정한 이성으로 차분히 가라앉혔다.
L은 나를 잘 따랐다. 친근한 오빠이자 동아리 학교 선배라는 포지셔닝은 매우 유효했다. 네이트온 채팅으로 오늘 있었던 짜증스러운 일, 감동받은 일. 듣기 좋은 노래 리스트 등의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이어갈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네이트온 상태 알림말은 내가 메일 체크해야 하는 민감한 과제였다. 난 그 상태 알림말을 체크해서 그녀가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했다. L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날에는 그냥 컴퓨터를 꺼버렸다.
난 복학생 3학년, 그녀는 4학년. 후배지만 한 학년 위인 그녀에게 듣기 좋은 전공과목 수업들, 학점을 잘 받기 위한 자잘한 팁들을 전수받았다. 그녀가 집밥이 먹고 싶다던 날에는 자취방으로 초대해 직접 요리를 하고 밥을 지어 먹였다. 물론 오해 금지. 그녀와 친했던 친구들 여럿을 함께 불렀다. 그래야만 이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코 넘어선 안될 기준선을 응시하며 혹시 내가 너무 가깝게 그 선에 위치했는지,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수시로 체크했다.
2011년 5월 10일, 성년의 날. 오전 수업이 없던 관계로 나는 서둘러 꽃집에 들러 장미꽃 두 송이를 샀다. 오로지 L을 위한 꽃이었지만 기준선을 넘어선 안된다. 한 송이는 L에게 주고 또 한 송이는 혹시 모를 그 순간, 그녀와 함께 있을법한 불특정 여후배에게 줘야겠다고 계획했다. 장미꽃 두 송이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낯선 풍경. 길에서 마주친 동기며 후배들은 모두 내게 그 꽃의 주인에 대해 물었다.
"아, 이거? 그냥 누구 줄라고."
"이열~ 그게 누군데?"
"아 그런 게 있어. 잘 가~"
갸우뚱 거리는 그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재끼면서 난 하필 비좁게 느껴지는 그 통학로를 원망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 속에서 난 장미꽃 두 송이를 든 채로 걸었다. 쭈뼛쭈뼛, 어설프고 안절부절못한 걸음걸이. 한참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빨개진 얼굴이 들킬까 봐 무서워 보폭을 넓혀 그녀가 있을법한 그 공간을 향해 빨리 걸었다.
"어? 오늘 L 일찍 집에 갔는데. 오빠, 그 장미꽃 L한테 주는 거예요?"
아뿔싸, 계획은 실패했다. 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동기들 시선. 손에 든 장미꽃이 멋쩍어 보여 마치 단체로 준비한 것 마냥 얼버무린 채 서둘러 그 공간을 나와버렸다. 화끈거리는 얼굴, 쿵쾅거리는 심장. 지금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문득 그 거절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제 와서 이 장미꽃을 전해주지 않으면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난 그녀가 있는 집으로 갔다.
"우와~ 오빠, 이 꽃 정말 나한테 주는 거야?"
장미꽃 두 송이. 모두 L에게 주었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성년의 날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웃어넘겼다.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는 그녀. 누군가 이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두려워 말도 몇 마디 못하고 와버렸다.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결국 해가 바뀔 때까지 고이 간직한 진심은 표현하지 않았다. 절제된 이성이 제멋대로 나대는 감성을 이기는 순간. 아이유의 <좋은 날>처럼 난 결국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다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하는 망상을 수없이 떠올렸다. 그리고 위로했다. 하지 못한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그녀와 소소한 대화를 즐거움으로 만족하자.
그 후로 어느 누구도 그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L을 좋아하는 복학생의 심리상담도 연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