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센스 (2012.10.31)
불안함 감추기 위해 목소리 높이며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화내며 지껄이고 헤매었네 어지럽게
누가 내 옆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
그때도 난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망가진 날 믿을 수도 없어 한참을 갈피 못 잡았지.
내 의식에 스며든 질기고 지독한 감기, 몇 시간을 자던지 개운치 못한 아침.
조바심과 압박감이 찌그러트려놓은 젊음 거품, 덫들, 기회 대신 오는 유혹들.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2012년 난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치열한 취업전선의 최전방에서 88만 원 이상을 받기 위해서.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폭탄들 피해 적진을 향해 돌격 중.
보잘것없는 스펙, 가진 거라곤 손가락에 셀 수 있을 법한 독서량, 남들보다 약간의 시간을 더 할애한 글짓기. 우리는 삶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 직업을 찾아다녔다. 제법 그럴싸한 도구를 획득한 선배들은 학교에 방문해서 취업특강이라는 구실로 삼아 자신의 성공을 자축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 속에서 난 너무도 나약했다. 각종 공모전 수상실적과 인턴 경험. 입사하고자 했던 메이저 광고회사들은 준프로를 원했다.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한 극소수를 위한 자리. 난 책장에 고이 모셔둔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집어던져버렸다. 처참하게 박살난 아마추어 카피라이터. 이 꿈마저도 지난 2006년처럼 조용히 떠나보내야 한다. 서울의 밤은 냉정하고 가혹했다.
메마른 감정에 이따금씩 기름칠을 칠했던 것은 바로 연애였다. L를 향한 망상은 그만두었고 난 현실로 돌아왔다. 통통 튀는 느낌을 가진 N과 연애를 시작했다. 심적으로 많이 부담이 되던 시절. 혼자 남겨진 느낌과 패배자의 감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 감정들이 불쑥 찾아올 때마다 난 연애에 더 집중하며 현실을 회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야. 나중에 결혼할 즈음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N은 차갑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작별을 고했다. 이력서에 한 줄을 쓸 요량으로 잠시 해외봉사활동에 다녀온 사이 그녀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다. 다만, 이별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위한 감정이 사라졌을 뿐. 그녀는 서둘러 나와 이별하고 다른 남자를 만났다.
인정하기 싫었다. 가뜩이나 처절한 전쟁터에서 연애에 있어서까지 다른 남자에게까지 패배했다는 그 느낌이 싫었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수없이 반복하며 되뇌었다. 말로 다할 수 없던 배반감에 휩싸여서 연일 씩씩거리기만 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력도 스펙도 없는 취준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나 자신이 진정 볼품없어 보였다. 내가 비참하게 보일수록 찌질하고 구차하게 그녀에게 더 집착했다.
"형, 진짜 그만 좀 징징거려."
징징거린다는 표현이 너무도 적절하게. 난 내 곁을 지키던 대학 친구들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렇게 야속하냐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를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들은 혀를 끌끌 찼다. 나도 모르겠다고. 그냥, 나의 억울한 심정을 이해해달라고. 난 지금 너무 힘들다며 앵무새같이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찌질이. 불현듯 떠오르던 지나간 실패의 감정들이 새삼스럽게 차오르면 찌질함은 극에 달했다.
몇 달간 유별난 이별 치레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난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그녀를 향한 배신감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실제로 증오했던 것은 현실 경쟁에 치여 저 끝자락으로 밀려나 있던 혐오스러운 나 자신. 변화를 꽤 하여야만 한다. 외형을 바꾸고 내형을 바꿔 온전한 정신을 내 안으로 들여야겠다.
밤마다 신림천 도로변에 나가 뜀박질을 했고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다.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참지 못한 갈증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스팔트 땅바닥에 처박혀 도저히 맥을 못 추던 자존감도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몇 번의 면접을 보았고 이력서 여백공간을 나름의 경험들로 채워갔다. 가끔 나태해져 그 찌질함을 잊을무렵, 난 이센스의 <독>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합격!"
옆 건물에 사는 동기 녀석에게 말했다. 서둘러 짐을 싸야 한다고. 가혹한 서울의 밤에 질려버려 난 세종으로 떠나려 한다고. 정부부처 계약직 공무원, 해야 할 일은 대변인실 정책홍보. 이만하면 내 전공과 그간 경험을 살려볼 수도 있겠다. 보수는 적어도 그만. 난 실무경험이 필요했다. 꼬깃꼬깃하게 구겨져 카피라이터 꿈을 살포시 다시 펴봤다.
세종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 큼지막한 비석에 새겨진 '세종정부청사' 글씨를 배경 삼아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페이스북에 업로드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태하고 찌질했던 그는 사라졌고 이제는 달라졌다고.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우연히라도 그 사진을 Y와 L과 N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