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이 모자라

선미 (2013.08.26)

by 안개홍

널 보고 있으면 모든 걸 다 잊어버려 니가 나를 가득 채워.

널 안고 있으면 모든 게 완벽해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어.

24시간이 모자라 너와 함께 있으면 너와 눈을 맞추면

24시간이 모자라 내가 너를 만지고 니가 나를 만지면


매력, 시건방, 자신감이라는 단어들이 내 안에서 정점을 찍는 순간. 취업전쟁 최전방에서 모퉁이로 숨어 한 템포 쉬었다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저 멀리 목표한 지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결코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몇 년간 뼈저리게 패배의 낙인효과에 대해 학습했다. 명확한 비전이 건강한 자신감과 짝을 이루는 그 순간. 극명하게 대비된 현실과 미래의 간극이 가까워질 그 찰나에 난 임시직이 아닌 정규직 직장인이 되었다.


꿈만 같았던 공공기관 행정직 입사. 뒤범벅된 실타래처럼 꼬이고 꼬였던 온갖 수고와 노력들이 비로소 빛을 보는구나. 합격소식을 듣자 엄마와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여하튼 머릿속에서 상상만 해왔던 보편적인 모습들. 합격 문자 캡처 후 페이스북 업로드. 본인 일처럼 좋아해 주셨던 대변인실 이과장님과 곽사무관님.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 새로운 기분으로 맞춘 양복. 정갈하게 다듬은 머리. 반짝이는 검은 구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자, 여기는 홍보실에서 오늘부터 일하게 된 건형씨."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경쾌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로 최대한 우렁차게 인사를 박았다. 호응인지 견제인지 모를법한 눈빛들 사이에서 내 목소리는 적막함을 거둬들였다. 분주한 교차로 한가운데 정차한 초보운전 차량처럼 모든 시선이 내게 멈춰 섰다. 집중 받고 있는 느낌, 그때는 그것이 절대 나쁘지 않았다.


빡빡하게 돌아갔던 24시간. 어느새 입사한 지 6개월. 들떠있던 마음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던 내입은 점차 조용해져 갔다. '퓨슝'하고 힘없이 꺼져가는 퓨즈 빠진 자동차처럼 하루의 절반을 넘게 회사에 남아 일을 했다. 상사의 분노를 머금은 거친 숨소리와 자조 섞인 상태로 중얼거렸던 혼잣말의 반복. 생각보다 직장생활의 즐겁지는 않았고 빡샜다. 상사는 그것을 '트레이닝'이라고 표현했다.


"무쇠처럼 단련시켜야 한다."


상사가 내게 쳇바퀴처럼 하던 말이었다. 나는 달궈지지 못하고 끝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이었다. 압도감과 중압감은 나를 흘러내리게 했다. 몇 잔의 커피를 마신 지도 모르고 몇 개비의 담배를 피운지도 모른 채, 이미 한도가 꽉 차 있는 카페인이 들어간 에너지 음료를 벌컥 들이키며 오늘을 위해 내일을 미리 가져다가 썼다. 내 위와 정신상태는 나를 원망하듯이 뒤틀리고 울렁거렸다. 톱니바퀴에 두 다리와 팔을 끼워 의식 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회사에 출근했고 퇴근했다.


과부하에 걸려 덜거덕 거리던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P였다. 첫 출근의 설렘과 비슷한 감정을 난 P에게 느꼈다. P는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 그녀는 수줍고 밝은 기운의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건드릴수록 입이 움츠려 드는 미모사 같이 조심스러운 존재. 그녀는 항상 내게 무심했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봐도 시원찮은 대답뿐. 명확하고 확실한 답변을 받기는 어려웠다.


"오늘은 시간 좀 내줄래? 나 보고 싶은 영화 개봉했는데."


오늘도 역시 무응답. 애석하게 그녀가 읽었음을 알 수 있는 '1'이라는 숫자는 이미 사라진 상태. 24시간 중에 단 3시간도 내게 허락할 수 없나 보다. 회사에 남아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이마에 손을 얹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2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까똑'하며 반가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영화 말고 카페는 어때요?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해서"


이미 회사에서 10잔도 넘게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처음 마시듯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녀는 잔잔한 잎새 향이 나는 얼그레이 차를 시켰다. 애써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그녀가 초점이 반쯤 나간 동태 눈깔을 보았나보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는 걱정을 해줬다. 참 따뜻하다. 따뜻한 감정, 진짜 오랜만이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어깨에 잠시 기대어 딱 5분만 눈을 부치고 싶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애꿎은 커피잔 한가운데를 티스푼으로 뱅뱅 돌려댔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친 심신을 달래줄 포근한 엄마 같은 마음씨였다. 그녀는 분명 그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


불쑥, 대뜸이라는 단어처럼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P를 찾아가서 단 5분만이라도 보는 것이 유일한 피로를 달래는 일이었다. 집이며 카페며 연습실이며 가리지 않고 그녀를 찾아다녔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지치지 않게 이리저리로 끌었다.


“오빠, 좀 쉬어 피곤해 보인다.”


그녀의 24시간 중 내게 할당된 시간이 정확히 3시간을 넘었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난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 같은 포근함. 따뜻한 온기. 내이마 위에 놓인 그녀의 손결. 들숨과 날숨이 느껴지는 그녀의 입김. 그 아늑함 속에서 난 온전한 평온을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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