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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Sep 06. 2023

날 이렇게 무한히 사랑해줘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가수에게는 노래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이유로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의 아이돌 산업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성격과 스타일로 무장한 소녀‧소년들은 물론 수십 명의 작곡자와 프로듀서, 안무가, 기획사가 철저한 전략으로 만들어낸 노래와 퍼포먼스는 기본입니다. 노래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기회는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회를 얻었다면, 요즘은 자체 제작 콘텐츠(유튜브, 실시간 라이브 등)를 통해 주목받기도 합니다.

 

JYP의 막내 걸그룹 엔믹스는 그런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만났습니다. 트와이스를 알고 있었으니 후배 그룹인 잇지(ITZY)도 알고, 엔믹스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뷔곡은 실망스러웠고 곧 제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전 구닥다리입니다. 요즘 노래 트렌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설령 어떤 리듬과 스타일이 유행한다 해도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되묻습니다. 이건 구닥다리인 동시에 반골 기질인 것 같네요. 그러니까 요즘 느낌을 잔뜩 버무려 담았다는 엔믹스의 노래가 제게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귀에 안 들리는 노래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유튜브 알고리즘은 가끔 제게 신기한 경험을 안겨줍니다. 여행을 하는 것과 같아요. 정해진 길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상한 길이 있노라 알려줍니다. 그게 뭔지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일단 따라가 보는 겁니다. 인생은 모험이라고 누군가 말했잖아요. 아마 저는 트와이스의 노래들을 유튜브로 살펴본 모양입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제게 엔믹스, 정확히는 리더 오해원의 쇼츠 영상을 알려줬습니다. 선명한 음색과 정확한 딕션,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말투는 제가 생각하는 아이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순발력도 좋았어요. 실시간 방송을 하면 팬들이 여러 질문을 쏟아내기 마련인데, 오해원은 그걸 재치 있게 받아칩니다. 그냥 받아치는 정도가 아니라 성대모사나 유행하는 드립을 섞어요. 게다가 과거의 콘텐츠에 대해서도 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오해원은 한때 엄청난 팬덤을 양산했던 <무한도전>의 팬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아는 게 많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 리더를 주축으로 엔믹스는 급기야 무한도전을 패러디한 콘텐츠를 만들어냅니다. ‘믹스상사’, ‘해원이는 열두 살’ 같은 콘텐츠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엔믹스를 <무한도전> 패러디 콘텐츠로 만났습니다. <무한도전>의 열혈 팬까지는 아니었어도 주요 에피소드는 다 외울 만큼 잘 알고 있던 저로서는 반가웠어요. 게다가 그들은 능청스럽게 연기하더군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콘텐츠를 본 다음에야 저는 엔믹스의 노래를 찾아 들었습니다. ‘Love me like this’라는 곡이 제일 귀에 들어왔어요. 노랫말은 그다지 볼 필요가 없어요. 8할의 영어와 2할의 한국어가 뒤섞인 노랫말은 일정한 서사를 갖춘 게 아닙니다. 그저 날 사랑해줘, 날 마음껏 사랑해줘.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돌 음악은 노랫말과 리듬, 멜로디, 퍼포먼스 등이 다 합쳐져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게 한 무대에서 펼쳐진 다음에야 그 노래의 진가를 알게 되지요.

 

날렵하고 경쾌하게 ‘날 이렇게 사랑해달라’는 노래가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반복되는 노랫말 덕분인지 저는 이게 마치 ‘날 이렇게 무한히 사랑해줘’라고 들렸습니다. 검정치마의 노래 ‘좋아해줘’가 떠오르더군요. “날 좋아해줘/아무런 조건 없이/니 엄마 아니 아빠보다 더”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있잖아요. “제발 부탁인데 조건 달지 말고 그냥 무한히 사랑해줄래? 날 바라봐줄래?” 수동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게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누구나 사랑을 주고, 받고, 하길 원하잖아요.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구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담겨 있길,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길.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도 아니고,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더 간절하고 애절하게 구애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10대, 20대만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40대, 60대, 70대도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죠. 엔믹스의 노래를 들으며 그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무한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 많고 많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사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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