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nyeong Sep 10. 2023

인생의 러닝타임을 줄일 수 있습니까?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1998년 만들어진 허진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를 두고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죽기 전에 영화 한 편 볼 기회가 생기면 이걸 볼 거라고요. 너무 무게 잡는 것 같아 걱정되지만 거짓은 아닙니다. 그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이 영화가 제가 사랑하는 요소들을 고루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영화는 도심이 아닌 군산 지역의 한여름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의 힘도 크게 작용했겠지요. (잠시 유영길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이 그려낸 군산의 한여름은 제게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가 가진 아날로그의 정서 또한 사랑합니다. 필름카메라와 예스러운 사진관, 빨간색 스쿠터, 황토색 마루가 깔린 거실과 푸르른 정원, VCR과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 ‘거리에서’까지. 그 오브제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귓가와 코, 입, 머릿속을 자극합니다. 당장이라도 군산으로 가면 정원사진관과 그 넉넉한 풍경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자극적이고 직설적이지 않은 사랑의 아릿한 설렘을 담고 있습니다. 정원과 다림은 요즘 흔한 멜로영화에서처럼 키스를 하지도, 몸을 섞지도 않습니다. 아주 오래 서로를 지켜보다가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천천히 빠져들고, 간신히 팔짱을 낍니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 서로를 탐색하며 벌어지는 그 짜릿한 신경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다들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삶과 죽음에 대해 조곤조곤 생각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죽음을 앞두었다고 좌절하거나 울기보다는 그저 담담히 당신의 삶을 살아보라고 제안하는 영화입니다.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우린 분명 알고 있습니다. 정원의 푸근한 웃음과 숨죽인 울음 사이에 영화를 보는 우리의 삶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우린 때로 울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누구나 그렇듯 삶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도 정원처럼 추억이 아닌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모든 걸 말하고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정원의 눈물이 보이지 않아도 우린 충분히 그의 고뇌와 비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울부짖는 가족이 없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마지막 정원사진관 앞에서 자신의 사진을 보며 다림이 웃는 모습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성숙한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숙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지닌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를 제 인생의 멘토, 롤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힘들거나 고민이 많을 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면 이 영화를 찾아서 봅니다. 정원의 푸근한 표정과 군산의 아름다운 여름 풍경이 절 붙잡습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매일 하던 대로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삶은 특별한 게 아니야, 너의 일상이 곧 너의 행복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젠 너를 남겨 두고 나 떠나야 해 사랑도 그리움도 잊은 채로 고운 너의 모습만은 가져가고 싶지만 널 추억하면 할수록 자꾸만 희미해져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너의 마음 알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의 손을 잡아주렴 지금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가슴으로 널 느끼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어    

 

영화의 멋진 엔딩에는 정원의 내레이션이 흐르고 크레딧이 올라가면 정원 역의 한석규가 부르는 노래 ‘8월의 크리스마스’가 흐릅니다. 멜로디가 좋은 데다 음이 높지 않아서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입니다. 하지만 찾아서 들어보니 노랫말이 아쉽습니다. 영화의 매력은 ‘숨김’인데, 이 노래는 너무 많이,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끝까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정원의 마지막 편지를 대신 들려주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어요. 영화에서 정원의 편지가 공개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드러나지 않아야 더 흥미로운 법이니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게 대중의, 뭇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의 손을 잡아주렴 지금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가슴으로 널 느끼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어”라는 노랫말은 확실히 노골적이고 직접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조차 자간과 행간 사이에 묻어두어야 한다면, 너무 재미없는 인생 아닌가요? 영화는 예술적일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굳이 그러한 예술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피와 살이 흐르는 현실 세계에서 피부를 맞대며 살고 있으니까요. 예술작품은 삶의 몇 부분을 포착해 압축해냅니다. 그다음 그 조각들을 작가의 상상력과 예술적 기법으로 표현합니다. 그 조각들은 때론 낯설고, 때론 신선합니다. 압축했기에 지루하지도 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든 삶 대부분을 통째로 살아갑니다. 누구도 삶의 러닝타임을 줄일 수 없습니다. 24시간은 24시간이고 365일은 365일입니다. 지루하고 식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결국 우리는 그 지루하고 식상한 삶을 온몸으로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누구도 영화 속 삶을 동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생각보다 대단한 분들입니다. 영화나 소설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것,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살아가는 일을 해내고 있는 분들이니까요. 그러니 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을 땐 사랑하고, 울고 싶을 땐 웁시다. 떠나고 싶을 때는 떠나고, 배우고 싶을 땐 배웁시다. 말하고 싶을 때는 말하고 쓰고 싶을 때는 쓰세요. 당신의 인생은 오직 당신만이 살 수 있습니다. 통째로 사는 일은 더욱 당신만 가능하죠. 그러니 이 인생의 주인공은 오로지 당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슬프고 우울하더라도,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에는 언제나 수천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당신에게도 곧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그러다가 다시 나빠질 수 있겠지만 괜찮아요. 그러다가 또다시 웃는 날이 올 거잖아요. 

이전 21화 네가 행복하길 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