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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Sep 17. 2023

마법이 사라진 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지나간 노래들이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지루하거나 잘 들어오지 않았던 노래들을 요즘 다시 들으면 “이 명곡을 내가 왜 몰라봤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승철 4집 수록곡 ‘누구나 어른이 되서(어법상 ‘돼서’가 맞지만 앨범에 표기된 ‘되서’를 따름)’도 그런 경우입니다. 부활 보컬 출신의 이승철은 솔로로도 크게 성공을 거뒀지만 3집 <방황> 이후 대마초 사건이 적발돼 한동안 방송 정지 판정을 받았습니다. 방송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앨범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세계 수준의 연주 세션과 프로듀서, 엔지니어, 코러스 등을 섭외해 4집을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4집 <색깔 속의 비밀>이 탄생했습니다.      


당연히 방송은 할 수 없었지만 앨범은 불티나게 팔렸고 투어 콘서트는 매진 연속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승철 인생 최대 명반’이라는 극찬을 보냈죠. 앨범 타이틀과 같은 1번 트랙의 ‘색깔 속의 비밀’은 재즈풍 연주가 돋보였고, 2번 트랙의 ‘겨울그림’은 아카펠라 팀 ‘뉴욕 보이시스’의 하모니가 돋보였어요. 음악인 정원영의 드라마틱한 작곡도 한몫했어요. 그 밖에도 명곡들이 많습니다. 당시에 ‘누구나 어른이 되서‘라는 곡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어른이 되서 나이가 먹어가며는 자신의 얘기밖에는 남 얘길 들을 줄 몰라/누구나 어른이 되서 철없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할 때면 어쩐지 쑥스럽겠지 스쳐 흘러가는 시간들조차 하늘 속에 숨어 날 바라보네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안길 수도 없는 어른이 되버린 나 세상을 함께 바라보던 친구들은 하나둘 멀리 떠나고 철없던 시절로 갈 테야 누구라도 내 손을 잡아주렴      


어법에 맞지 않은 노랫말이 자꾸 귀에 거슬리지만, 지금 다시 듣는 ‘누구나 어른이 되서’에는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 남 이야기는 안 듣는다는 말은 주변 어른들을 통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죠. 고민과 비밀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어른이 됐다는 노랫말도 그렇고요. 몇 안 되던 친구는 이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게 됐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혼자인 삶, 혼자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솔로!’를 외치며 독신의 삶을 즐기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저는 혼자 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하고 그리워합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길,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제 가족 외에는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회사에서는 업무 이야기만 하느라 바쁜 데다가 설령 대화할 시간이 나더라도 접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넷플릭스나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 심취한 회사 동료들은 제겐 그저 외계인처럼 느껴질 따름입니다.      


남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는 외로움이 동반된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외롭다고 울부짖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과거 제가 살던 세계에는 마법이 있었습니다. 젊다는 것, 가능성이 있다는 것, 청춘에 분류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마법이자 황금 카드였습니다. 하지만 매년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 40대가 된 저에게는 그런 마법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마법이 들어찼던 자리에는 이제 덩그러니 삽 한 자루만 놓여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이제 저는 넓게 파서 깊게 들어가 볼까 합니다. 왜 그러냐고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파면 팔수록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존재들이 절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커피가 될 수도, 책이나 영화가 될 수도, 요리나 수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커피 원두의 깊은 향이, 책 속 무수히 많은 문장이, 요리 속 많은 재료와 과정들이 저를 다독입니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넓어지기 위해 넓게 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깊어지기 위해, 자신에게 더 몰두하기 위해 넓게 파고 있습니다. 특별한 결과물을 얻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절 행복하게 해주거든요. 그러니 저는 오늘도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팝니다. 이런 게 다 어른이 돼가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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