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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Sep 07. 2023

네가 행복하길 바라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고등학교 시절 저는 쭈구리였습니다. 작고 못생긴 데다 여드름투성이였던 사내아이는 어느 여자아이에게도 자신 있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모 사범대학교 부설 고등학교로 매년 반마다 열 명가량의 교생 선생님이 왔습니다. 때마다 저는 예쁜 여자 선생님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죠. 한 달가량의 교생실습이 끝나고 그 선생님이 작별을 고하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오고는 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늦은 하교길에 남몰래 골목 구석으로 숨어들어 눈물을 훔쳤습니다. 흔하디흔한 작별인사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글을 습작하며 백일장을 휩쓸고 다녔던 저는 고등학교 때도 문예반 활동을 했습니다. 언젠가 책을 찾으려고 교내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본 여학생을 보고 반했습니다. 아, 제 사랑은 또 시작된 겁니다. 강정은. 저는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단정한 단발, 이국적으로 아름다운 외모, 큰 키의 그 아이는 도서반 학생이었습니다. 아마 키가 저랑 비슷했을 겁니다. 3년 내내 도서관이나 학교 건물 근처에서 마주쳤지만 끝끝내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습니다.      


하루 해가 저물어 어둠이 다가오면/지나치는 모습 속에 너를 찾아 헤맸지/어느새 내 얼굴에 소리 없이 내리는 이 빗물은 너를 향한 나의 눈물이겠지/우리의 사랑 우리의 만남/내 맘 깊이 간직하고 있어/이제 다시는 볼 수 없지만/너의 미소 내게 남아 있네/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서 나의 사랑을 잊어도 영원한 나의 사랑은 내 맘 깊은 곳에 남았어/이제 너를 기다릴 뿐이야     


자화상 1집 타이틀 곡 ‘나의 고백’을 들으면 그때 그 소녀가 떠오릅니다. 유재하경연대회 출신의 나원주, 정지찬이 뭉쳐 만든 듀오 자화상이 2002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돼 있습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면 어떤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그 소녀와 내가 함께 걷고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장면들입니다. 환상 속에서 그 소녀와 전 한때 연인이었습니다. 비록 헤어졌을지라도 말이죠. 그 환상은 짧지만 달콤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인기 없는 사내아이에게 다가와 준 고마운 소녀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이곳은 아무도 없는 빈방입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날벌레나 개미들이라도 들어오면 그게 그렇게 반갑습니다. 녀석들은 어쨌든 제겐 고마운 손님이잖아요. 현실의 저는 언제나 초라합니다. 자신감이 없고 어째는 축 늘어져 있습니다. 여자들은 언제나 저를 외면합니다. 고등학교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건 똑같습니다.      


십여 년 전까지는 그럴 때면 ‘나의 고백’을 찾아서 들었습니다. 그러면 제 머릿속에는 다시 그 소녀가 나를 찾아왔죠. 그 소녀는 여전히 고등학생이었고요. 왠지 죄책감이 들어 더는 꿈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러 이 노래를 외면해왔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다시 듣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든 그 소녀를 떠올리게 됩니다. 졸업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말이에요. 상상 속 그 소녀는 이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소녀의 삶과 미래를 응원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 넌 한때 나를 꿈꾸게 한 사람이니까. 눈을 뜨면 진짜 소녀의 현재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나이를 생각해보면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이 없이 사는 딩크족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요. 제가 그 소녀에 대해 아는 것은 고등학교 무렵의 외모와 이름뿐입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요. 부디 행복하길,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더라도 편안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길 바랍니다.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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