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일제강점기 당시 문학과 언론은 같은 뿌리에서 싹을 틔우며 자랐다. 기자가 곧 문인이었고 신문이 곧 문학작품 발표 무대였다.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는 문인인 동시에 언론인이었다. 정진석 교수는 국내 1세대 언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언론학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시 문인들이 그랬듯 문학과 역사학까지 두루 섭렵해왔다. 넓이와 깊이를 두루 갖춘 덕에 그의 연구는 더욱 독보적이고 압도적이었다.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고 신문 잡지의 영인본과 문헌 목록, 색인을 만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죽어 있던, 아니 묻혀 있던 기록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옛 신문과 함께 호흡한 지난 시간
포털 사이트에서 정진석 교수의 이름을 입력하면 동명의 인물 프로필 여럿이 뜬다. 사진과 생년을 확인해 그중 하나를 클릭하면 몇 줄의 간단한 약력이 나온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무슨 연구를 했으며 무슨 상을 수상했다는 설명이다. 그 몇 줄 안에 정진석 교수가 50여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올린 열정과 노력, 그리고 호기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수십 권의 언론 관련 저서를 출간했고 언론 관련 자료집과 문헌해제, 신문‧잡지 색인 등을 만들었다. 『한성순보/한성주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와 1945년 광복 후부터 1953년까지 발행한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의 지면 전체를 모은 영인본을 편찬했다. 조선총독부 언론통제 자료총서(전 26권)와 조선총독부 직원록(1911~1942년, 전 34권) 같은 자료를 발굴하고 영인하여 언론계와 역사학계에서 자료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고어(古語)투성이 예전 신문들을 일일이 찾아 영인하고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은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시켜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그만큼 정진석 교수는 언론사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품고 살아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자료를 찾고 보관하고 관리하는 일에 흥미가 있기는 했습니다. 대학 신문사와 KBS 방송조사연구실, 한국기자협회 등에서 일하며 신문과 언론이라는 것에 점차 빠져들었던 듯합니다. 신문을 만들었죠.”
본인의 연구를 이야기하는 정진석 교수의 얼굴은 환하게 번뜩인다. 중앙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1학년부터 『중대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졸업과 동시에 KBS 방송조사연구실에 근무하면서 『방송』이라는 주간 신문을 만들었다. 학창시절 품었던 소설가의 꿈을 떠올리며 196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진석 교수가 원하는 것은 언론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에는 런던대학 정경대학 국제사학과(Dept. of International Histo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문학과 국문학, 언론학, 역사학을 두루 거치면서 언론사 연구에 매진했으니 언론계 선배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언론탄압을 연구하면서 학계와 언론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시대 발행한 신문들은 당시 하루하루를 충실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문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은 당대와 호흡하며 그 시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신문을 비롯한 언론은 민족운동의 중심 역할을 맡았기에 더 각별했다. 사람들은 언론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쥐며 고난의 시기를 건넜다. 일제강점기의 언론 연구는 정진석 교수에게 곧 그 시대 사람들과 호흡하고 이해하는 길이었다. 그 시절을 이해한다면 곧 후대의 우리들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터. 정진석 교수는 일제강점기 언론을 파고들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구 세계를 넓고 깊게 만들어나갔다.
무엇 하나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옛 신문에 적힌 한두 줄의 기사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자료를 찾는 일은 일상이었다. 얼마나 정확한지, 혹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확인해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나남출판, 1987)이 제 대표 저서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어로 된 비밀문서와 영국의 국립기록보관소(예전 명칭은 Public Record Office, 현재는 National Archive), 일본 외교문서 등의 관련 자료를 일일이 복사해서 확인한 끝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그 밖에도 고어, 일본어, 영어 등 각기 다른 언어로 적힌 자료들을 찾아 사실 여부를 확인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아요. 연구하다 보면 항상 있는 일이죠.”
역사책보다 생생하게 기록된 신문의 매력
정진석 교수가 우리나라 언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은 크고 압도적이다.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1883년 개화파가 창간한 『한성순보/한성주보』, 1896년 4월 서재필이 창간한 국내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명 ‘배설’)이 1904년 7월 18일 창간했던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영인했다. 그것만으로도 방대한 분량인데 광복 후에 발행된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의 지면 전체를 모은 영인본을 편찬했고 언론 관련 자료집, 문헌해제, 신문 잡지의 색인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 28권 중에는 이광수, 배설 등 중요 언론인을 집중 조명한 책도 있다. 근대문학과 역사학을 연구하는 현재 학자들이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절의 국내 언론에 대해 한결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진석 교수는 언론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이러한 노력은 응당 기본이라고 믿는다.
“신문에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서술된 역사책보다 훨씬 생생한 그 시대가 기록돼 있어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게 많습니다.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같은 신문을 면밀히 읽다 보면 왜 우리나라가 당시 고난을 겪었는지, 어떻게 광복이 가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한두 마디로 정의될 수 없지만, 배울 지점들이 정말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종이 신문 발행부수와 구독자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출퇴근 지하철‧버스를 탑승한 사람들은 신문 대신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신문이 덜 읽히는 시대이지만, 정진석 교수는 좌절하지 않는다. 종이 신문은 수백 년이 지나도 검색이 가능하고 편집을 통해 뉴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신문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말에서는 50여 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집념의 학자’가 풍기는 따뜻한 마음과 간절한 희망이 느껴진다. 구한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넘는 언론사를 연구해온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언론 이슈는 무엇일까. 정진석 교수는 우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언급했다.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는데, 정부 기구의 도움 없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신문사가 중심이 되어 성금을 모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 캠페인인 셈이죠.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 의미는 깊습니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진행했던 문자보급운동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언론 캠페인이지요. 1920년대 후반 들어 직접적인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민족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느꼈죠. 이를 위해 당시 90퍼센트에 달하던 문맹률을 줄이고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두 신문이 중심이 되어 문자보급운동을 펼쳤습니다. 한글 교재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고 직접 가르쳤어요. 『사상계』를 통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장준하 선생도 학생 시절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했다고 술회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틀 밖에서 전체를 조망하며 유연하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의 행동과 말, 생각은 각기 다르다. 이상한 방향으로 삐쭉 솟아난 일부 나뭇가지에만 집중하다 보면 전체 숲의 구조를 파악하기 힘들다. 정진석 교수는 국내 언론사와 언론인 또한 이러한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사과가 꼭 만유인력 때문에 떨어진 걸까요? 강한 바람에 날렸거나 꼭지가 말라서 자연스럽게 떨어진 건 아니었을까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틀에 갇히면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론과 문학사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나무가 아닌 숲의 시각에서 포괄적이고 유연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인에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정진석 교수는 올봄 자신의 책 팔천 여 권을 서울 현대고등학교에 기증했고, 현재는 책들이 보관된 학교에 자리를 마련해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새로 옮긴 책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아서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이 돕고 있다.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교수와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소통한다. 흔히 수십 년 한 길을 걸은 연구자, 라고 하면 외곬에다 고집불통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진석 교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넓고 깊은 시선, 유연하되 강한 결기를 지닌 생각으로 세상과 언론을 들여다본다. 특별한 행동이라기보다 그것이 응당 자신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약력]
정진석(鄭晉錫)
1939년 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문학 석사, 런던대학교 정치경제대학원 국제관계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 언론계에 입문해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초대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 및 방송위원,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 이사,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서재필기념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1992년 제4회 희관언론학술상, 2008년 제22회 인촌상(언론출판 부문), 2016년 제29회 서울언론인클럽 언론학술상, 2019년 언론학회 60주년 학술영예상을 받았다. 『한국 현대언론사론』,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한국언론사』, 『언론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현대사』, 『한국영어신문사』, 『언론조선총독부』, 『언론인 춘원 이광수』,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등 28권의 저서, 8권의 공저와 수십 년치 신문 영인본을 편찬했다.
*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행했던(지금은 폐간) 『근대문학』 9호에 실린 원고를 이곳에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