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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올 때 맘, 갈 때 맘 달랐지만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조성모, 조덕배)

by 레몬트리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1993년도 발표곡이지만 저는 이 노래를 조성모&조덕배 버전으로 2006년 겨울쯤 들었던 것 같아요. 별 걸 다 기억하지요?

사실 이 노래는 제가 전 남편(오늘은 왠지 전 남편이라 표현하는 게 슬프네요 ㅋ)과 요즘 말로 썸을 타던 시기에 한참 들었던 노래거든요.

벌써 20년 전이니 그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었고, 이 곡을 듣는 건 출퇴근길 - 요즘은 보기도 어려운 MP3에 곡을 담아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듣거나, 객장(지점) 마감을 한 후 시재를 맞추고 일마감을 하면서 야근을 할 때 사무실에 틀어놓고 들었던 기억이 나요.


이 노래를 들으면 카카오톡도 없던 그 시절, 회사에서 비밀연애를 시작해서 사내 메신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설렘을 전하며, 매일 아침 출근길부터 퇴근길까지 두근두근하고, 설레던 그 겨울이 생각이 납니다.

신입사원인 시절은 아니었지만, 직원이 많고 지점도 많은 회사라 서로 잘 모르고 있다가 늦은 가을 회사 교육연수 과정에서 알게 되었었는데, 둘 다 입사 4~5년 차였는데 "왜 우린 그동안 서로를 몰랐지"하며 인연의 신기함을 종알종알 이야기하곤 했어요.

연애를 하던 중간에 저도 본사 발령을 받아, 한 건물에서 근무하는 행운이 따라줬고, 운명은 우리 편! 이라며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비상구 계단, 휴게실 자판기 앞에서 잠깐잠깐 만나 손끝만 스쳐도 입이 귀에 걸리곤 했고, 서로의 부서에 업무적으로 갈 일이 있을 땐 초콜릿이나 음료수 같은걸 몰래 책상에 놔두곤 하며 알콩달콩 연애를 했었죠.


그 겨울에 만나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멋들어진 오마카세 데이트 같은 화려한 데이트를 하진 않았지만 전 남편의 모교가 있던 신촌 근처에서 계절마다 학교 교정을 거닐며 계절을 맛보고, 연남동, 신촌 이대 근처를 돌아다니며 같이 직장 상사 욕도 하고, 회사 로맨스 소문도 재잘대며 젊음의 거리를 만끽하기도 했고, 야구 광팬이었던 그를 따라 (저는 비록 롯데 팬이지만) 오빠가 응원하는 팀이 내편! 하며 기아 응원석에 앉아 함께 응원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딱 1년 연애를 하고 그다음 겨울에 저는 스물일곱, 2월의 신부가 되었어요.



무슨 이혼했는데, 전 남편 이야기를 이렇게 로맨틱하게 하느냐고요?

비록 제게 올 때 마음과 갈 때 마음이 달랐지만, 스쳐가는 인연이 아닌 하나로 묶였던 인연이잖아요.

서로 일생의 운명을 함께 하겠노라 결혼 서약을 하고, 둘 사이에 세상 하나뿐인 귀한 아이를 얻은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가진 것 없고,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던 스물일곱, 서른하나

지금 돌이켜보면, 여전히 어린나이의 영혼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함께 손을 잡고 내디뎠던 '부부의 연'일까요?


이혼을 한 후에도 연애도 해보고, 썸도 타봤지만, 예전보다 철들고, 예전보다 생각할 게 많아서인지 그때처럼 세상과 맞서 모든건 사랑 하나로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 그때의 무모하리만치 뜨겁고, 용감했던 결단을

과연, 살면서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거든요.


한때 너무 설렜고, 그래서 사랑했고, 그렇게 결혼했던

한때 너무 믿었고, 그래서 의지했고, 그렇게 서로를 부모로 만들어 주었던

한때 너무 아프게 했고, 그래서 원망했고, 그렇게 이혼했던

지금은 남의 남자인, 그때의 나의 남자는

비록 내 마음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그 뒷모습이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여자로, 엄마로, 어른으로 만들어준,

어찌 보면 미워해야 마땅하지만, 어찌 보면 한없이 고마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연애 이야기이고, 10년 전의 이혼 이야기라 미련의 마음은 결코 없지만,

첫사랑을 떠올릴 때처럼,

여전히 계절이 지나갈 무렵, 한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면

가끔씩 추억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아련하게, 그 시절의 기억이 피워 오르곤 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정호승 님의 책에서 [봄길]이라는 시를 보고 아, 나는 봄길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던 적이 있어요.



[ 봄길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 남는 사람

사랑을 시작할 때도, 사랑이 끝이 날 때도

남에게 의지하거나, 남 탓을 하는 게 아니라

한없이 봄길을 걷듯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에 새겼던 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우리의 기억은 좋았던 기억도, 좋지 않았던 기억도 점점 희석된다고 해요.

듣고 보니 너무 적당한 표현인 거예요.

"희석된다."

그래서 처음에 불꽃같아 델 것만 같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 그 온기가 식어가기도 하고,

그래서 숨도 못 쉬겠다 힘들었던 마음, 아팠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서 웃으며 그때 그랬었나? 하는 때가 오는 것 같고요.


그런 의미에서인지 신이 인간에게 준 큰 은총 중에 하나가 '망각'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망각하기에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출산을 하고도 그 아이를 사랑하는 걸로 모자라 둘째 셋째를 낳고요.

아이들은 넘어져 무릎에 피딱지와 멍이 사라질 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걷고 뛰는 걸 포기하지 않지요.

그리고 우리는 상처와 아픔, 배신과 원망, 이 모든 것을 희석시키고 망각하며

다시 사랑을 꿈꾸어요.


아팠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희석시키면서.

슬펐던 기억을 사랑으로 덮어 망각하면서요.


그렇게 흔들리고 아파하며 결국 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니겠어요?

저에겐 점점 희석되고 망각되어 가는 기억지만, 분명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마음이 담겨 있는 곡


조성모&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이었습니다.



다가가면 뒤돌아 뛰어가고

쳐다보면 하늘만 바라보고

내 맘을 모르는지 알면서 그러는지

시간만 자꾸자꾸 흘러가네


스쳐가듯 내 곁을 지나가도

돌아서서 모른 척하려 해도

내 마음에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대는 무지갠가


뛰어갈 텐데 훨훨 날아갈 텐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아이처럼 뛰어가지 않아도

나비 따라 떠나가지 않아도

그렇게 오래오래 그대 곁에 남아서

강물처럼 그대 곁에 흐르리


뛰어갈 텐데 날아갈 텐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 원곡을 들으시려면,

https://youtu.be/vb4wcuKWiA0?si=zLilEYtT2V_iX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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