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여자의 사연 - 마침표를 찍은 순간
작년 가을쯤에 호수공원에 친구와 산책을 하면서 저 건너편에 보이는 법원건물을 가리키며, “아.. 나 저기서 이혼했잖아요. 하필 여기서 법원이 보이네?”라고 웃으며 농담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예전엔 여기만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딴청을 피우거나,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10년 전,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가던 그날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늦겨울의 바람이 매섭고 차갑기만 했던 2월이었는데, 3개월의 숙려기간이 지나고 판결문을 받던 그날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장 사랑스런 연둣빛을 한껏 머금은 녹음이 햇빛에 반짝이던 따뜻한 봄날이 한창이었다.
이혼하러 나서는 길에도 좋은 일로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불쌍해 보이고 싶진 않아서 옷을 뭐 입냐를 고민했던 나 자신이 잠시 어이가 없다가, 또 법원가는 길에 가로수가 이렇게 예쁠 일이냐 투덜댔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합의이혼, 자녀가 있었으니 3개월의 숙려기간이 있었고, 자녀양육(주로 면접이나 양육비 이행에 대한 부모의 책임감을 강조하는)에 관한 교육도 필수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면접과 양육비의 책임을 성실히 하지 못할 경우 아이가 받는 고통과 아픔을 담은 약간은 촌스러우면서도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동영상은 보는 내내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듯했지만, 또 한편으로 솔직히는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도 생겼다. “이혼 가정의 아이가 모두 불우이웃은 아니잖아!!”
외도라는 명백한 이혼 사유 앞에서 어떤 날은 숙려기간이라는 것이 쓸데없이 긴 것 같기도 하다가, 또 어떤 날은 아이가 지금처럼 지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시간이 천천히 가길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숙려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이삿짐을 정리했고, 살 곳을 알아봤고, 매일 조금씩 헤어질 연습을 했다.
최소한의 대화로, 최대한 아이에게 그늘진 모습을 보이지 않게, 최소한의 갈등으로, 최단기간에 정리하고자 움직이는
남편은 어느 날 저녁, 내가 타던 차키를 좀 달라고 하더니, 그날 내 차의 타이어를 다 교체하고 엔진오일이며 몇몇 소모품을 교체하고, 세차에 주유까지 해서 차를 가져다주었다.
부탁받은 적 없지만, 나 역시 남편이 출근한 사이에 여전히 섞여있는 우리의 옷가지와 짐들 중에 남편이 아끼던 셔츠나 타이가 보이면 남편 짐 상자에 찾기 쉽고 보기 쉬운 곳에 넣어두곤 했다.
연인과 부부는 이렇게 다르구나.
그냥 헤어지는 연인이라면 밖에서 만나 헤어짐을 이야기하고, 그 순간 당장 남이 되어 정리할 것도 거의 없고, 각자의 일상을 살아내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이혼은 참으로 생각하고, 챙겨야 할 것이 많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여행용 캐리어만 하나 들고 누군가 훌쩍, 쓱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마치 유학이나 분가를 하는 가족을 챙기듯, 미우나 고우나 옷가지며 물건을 정리해야 하고, 미처 상대가 놓친 부분을 서로가 챙겨주며, 때론 당부도 하며 그렇게 길고 긴 이별 준비 시간을 마주한다.
이혼이란 것은.
아마 같은 마음으로 남편도 차에 대해선 아는 게 1도 없는 내가 아이를 태우고 다니면서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이하진 않을까,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타이어부터 갈아 끼우고 왔겠지.
길고도 짧은 숙려기간 3개월 후 판결일.
판결받으러 오라고 하던 가정지원 O층 문 앞에서 만나도 될 것을 우린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굳이 법원 주차장에서 만나 나란히 함께 걸어갔다. 아마도 따로 다니는 게 한없이 어색한 서로 간의 익숙함이자, 이 마지막 순간조차 낯선이들 앞에선 나도 모르게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부부간의 오랜 습관 같은 거였겠지.
사실 판결문을 받았던 그날 법원에서의 장면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 순간의 감정도.
아마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의 무의식이 재빨리 기억을 휘발시킨 게 아닐까.
다만 기억에 남는 건 판결문을 받고 돌아오는 주차장 앞에서 남편이 내 차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과 그 앞에서 “얼굴이 많이 상했네. 밥은 좀 잘 챙겨 먹자. OO이 보러 자주 연락할게. 운전 조심하고..”라고 했던 남편의 마지막 앞모습, 그리고 “사무실 들어가야 하지? 조심히 들어가. 먼저 가”라는 내 말에 뒤돌아서서 가던 회색 슈트의 뒷모습.
한때 내 전부였고, 내 내일이었던, 내가 사준 슈트와 내가 고른 구두를 신고 있는 전. 남. 편.
하지만 나는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난 후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고 집으로 출발할 무렵 - 사이드미러로 비치고 있던 ‘뒤돌아서서 내 차를 바라보고 있던 남편’의 마지막 모습도.
우린 차마 웃으며 안녕을 고하진 못했지만, 마음으론 내가 너에게 그러했듯 너도 나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함과 아쉬움과 허전함을 가득 담은 인사를 전했었다.
이혼하자 말을 꺼냈던 순간
이혼 서류에 각자의 신상정보를 써 내려가던 순간
이혼 신청서를 가지고 법원을 처음 가던 순간
이사를 하던 순간
이혼 판결문을 받던 순간
이혼 신고를 하던 순간….
짧은 3개월간 수없이 이혼의 순간순간이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내 마음속에 우리가 진짜 남이 되었구나 했던 ‘진짜 이혼의 순간’은 아마 법원 주차장에서 서로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아주 일상적인 인사를 건네며 어제와 다름없는 듯했지만,
이 순간부터
이 아주 일상적인 것이 공유될 수 없는 어제와 분명히 달라진 그 순간.
내가 이혼하던 순간.
뭔가 마지막 이혼의 순간이 아련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것 같지만, 아마 나의 기억의 왜곡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이혼의 과정 속에 앞뒤에 뒤엉켜있던 여러 복잡한 사건과 감정이 있었지만, 아마도 나는 그 순간이 가장 덜 아프고, 덜 못나보여 그 순간을 우리의 마지막 마침표로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 후,
“이혼녀를 너무 불쌍하게 그린 거 아냐? “
“평소에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우먼 OOO은 없고, 슬픈 이혼녀 OOO만 그린 것 같아 “
이 연재를 시작하려고 글을 한두 개 쓰고 난 후 최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에게 살짝 보여주고받았던 피드백.
처음에 피드백을 받고 나선 너무 내 감정이 쏠렸나, 좀 수정을 해볼까 움찔했는데 곱씹어 생각해 보니 이 친구는 이혼 10년 차, 나의 씩씩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주로 봐왔던 터라 눈물 나게 슬픈 이야기가 왠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10년 전, 이혼 당시
서른다섯의 내 모습은 생기 없이 바싹 말라비틀어져 잡기만 해도 바스락 부서져버릴 것 같고, 조그만 불씨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마른 낙엽 같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사진을 봐도 아무리 웃어도 창백하고, 그늘진 모습이 싫어서 잘 들춰보지 않게 되던 시기.
지금의 내 모습과는 너무 다르니 10년 세월을 지켜본 이가 아니면, 지금 나를 보는 이들은 그때의 내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나답지 않아 보일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 는가.
나 역시 지금의 모습으로 지내기까지는 흔히들 경험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 원망은 물론 자책, 후회 등 온갖 감정이 뒤범벅인 애도의 시기를 보냈고, 어떤 밤은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무게 추가 발끝까지 추락하고, 발등을 짓누르던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야만 했었다.
그럴 때마다 10년 전 합의이혼을 하러 법원에 갔을 때 만난 부부상담 담당자분께서 해주신 한마디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난 이 문장을 수백 번도 더 되새기며 운명을 이겨내야지, 아이를 지켜내야지, 행복해져야지를 다짐했던 것 같다.
이혼 자체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한 때 사랑했던 이와의 영원한 이별이고,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고통이고, 한없이 추락하는 나를 건져 올릴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거늘
하지만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이 오고,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은 오고야 말듯, 이혼의 터널도 시작이 있으면 끝은 있기에 울 때 울고, 화날 때 화도 내며, 또 그러다 어떤 날은 안 그런 척, 태연한 척, 센 척도 하며 한발 한발 천천히,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나온 길을 솔직하게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은 틀린 것 같아도 그때는 맞다”로 표현할 수 있는 눈물 콧물 짠내 나는 신파 같은 그때의 슬픈 이혼녀의 이야기도 함께 공감해 주시길
미리 보기 서비스를 제공하자면, 나의 지난 10년은 생각보다 살아내느라 바쁜 탓이었는지, 태생이 긍정적인 정신승리 덕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물콧물의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고, 육아도, 일도, 사랑도 치열했지만 뜨거웠고, 숨 가쁘지만 충만했고, 멈추지 않고 흔들릴지언정 앞으로 내딛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으로 인해 나는 지난 10년간 제법 단단해졌고,
그 시간으로 인해 나의 앞으로의 10년이 더 빛날 것을 알기에.
외로워도 슬퍼도 우는 캔디였지만, 울고 털어내고 일어서서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를 향해 가고 있는 나의 지금도 함께 응원해 주시길!
그리고 부디 앞부분 전개의 눈물콧물 장면에 슬픈 영화의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나를 바라보진 말아 주길 당부하며,
3화 - “오빠 잘 들어갔어?”- 갈림길로 데려다 놓은 단 한마디는 금요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