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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29. 2019

고귀한 인간과 비속한 인간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이제 나는 바다와 언덕 위로 높이 솟은     

휘어진 가지 위에 앉아 있다네:    

새 한 마리가 나를 손님으로 초대하기에-    

나는 날개를 재빨리 퍼덕이며    

그를 향해 날아왔지 (...)     

-니체, <즐거운 학문, 포겔 프라이 왕자 중>     


니체는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이제  날아오른다. 오랜 질병기에 집필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를 거쳐, 삶의 바닥까지 파내려 가서 지하 속 ‘괴물’들을 만나 ‘삽질을 한 후’ 지상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이 <아침놀>인데 죽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중기작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활력과 환호성 속에 다시 ‘열린 바다’를 예감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새가 된 자유정신의 소유자 니체는 “영원한 충동이 나를 높은 곳에 이르게 하노라”라고 말한다. 충동, 니체에게 충동은 고귀한 천성을 지닌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이다. 비속한 인간은 이성에 휘둘리며 자유정신을 알지 못한다.(물론 니체가 비이성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고귀한 인간의 한가지 측면만을 논하기로 한다.)    


고귀한 인간을 니체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니체가 생각하는 비속한 인간은 어떤 유형일까? 니체에게 이 물음은 중요하다.    


“그들은 그의 기쁨을 경멸하고 그의 눈에서 빛나는 광채를 비웃는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불이익을 기뻐할 수 있는가. 어떻게 뻔히 눈을 뜨고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가! 고귀한 열정에는 이성의 질환이 달라붙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정신 도착자가 고정관념에서 얻는 기쁨을 과소평가하듯 고귀한 사람의 열정을 과소평가한다.

비속한 천성의 특징은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이득을 주시하고 내면의 어떤 충동보다 목적과 이득에 대한 생각이 더 강하다는 데 있다. 충동에 의해 합목적적이지 않은 행동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것이 그들의 지혜이자 자아 감정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3>    


 비속한 사람은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재미있다! 이들은 목표 지향적이며 어지간해서 충동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군상을 바보로 취급하고 경멸한다. 이들은 어떤 행위든지 목표와 목적이 설정돼야 하고 자기 이득을 최우선시하는 인간이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고귀한 인간의 열정을 ‘질환’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비속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고귀한 인간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고귀한 인간은 이해타산이 거의 없다. 이들은 계산하는 이성이 아닌 충동을, 힘의지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비속한 천성)에 비해  고귀한 천성은 더 비이성적이다. 고귀하고 관대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의 충동을 따르며 이 최상의 순간에 그의 이성은 중지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새끼를 지키거나 발정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암컷을 쫒는 동물은 위험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이성도 중지된다. 부화의 기쁨이나 암컷에게서 얻는 기쁨과 이 기쁨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이 동물을 완전히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때 동물들은 다른 때보다 더 어리석어진다. 고귀하고 관대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은 매우 강렬한 쾌와 불쾌의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지성은 이 감정에 대해 침묵하거나 아니면 이에 봉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 느껴지는 경우 심장이 머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사람들은 “정열”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 3>    


말하자면 고귀한 인간은 어찌 보면 비이성적 특성의 인간이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모성본능이나 발정 난 동물처럼 사랑에 목숨 거는 인간. 이들은 ‘어리석어지고 사리판단이 어두우며 머리가 아닌 욕망’을 따른다. 니체는 비속한 인간은 사랑에 목숨을 거는 고귀한 인간의 정열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귀한 천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열을 중시하고  일상의 규범을 무가치하게 본다. 또한 이들은 비속한 인간에게서 ‘인류의 어리석음’을 본다. 비속한 사람들에 의해 굴러가는 ‘이 세계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비속한 인간들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극악한 정신의 소유자들’, 즉 고귀한 자들은 인류의 잠들어 있는 ‘정열에 불을 붙이고 새로운 것, 모험적인 것을 향한 욕구’를 거듭 일깨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악의’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어떤 경우이건 악한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낡은 것만이 선하다! 어떤 시대에나 선한 사람들은 낡은 사상을 깊이 파내려 가 열매를 수확하는 정신의 경작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땅은 결국 이용되면서 수명을 다하게 되고, 악의 쟁기가 언제나 새로이 도래한다.” -니체, <같은 책, 4>    


이런 ‘악한’ 충동이 인류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새로움의 힘, 언 땅을 갈아엎을 쟁기의 충동과 악의.  본인과 타인의 사유에 망치질을 하는 인간. 자신의 힘과 충동을 사는 사람.      


재미있는 것은 고귀한 인간과 비속한 인간을 논할 때 니체 자신은 당연히 고귀한 인간군에 속한다. 천재에 대해 말할 때 니체는 당연히 천재다. 포겔 프라이왕자는 니체 자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다! 기준이 니체 본인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읽다가 푸하하-웃음이 터졌다. 제어가 안 된다. 웃음은 내 방을 채우고 거실로 번져나가 건넌방과 작은방으로 현관으로 나간다. 나는 웃는다. 자꾸 웃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긴다. 니체가 재미있어서 웃고 웃겨서 웃는다. 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웃다니? 니체가 너무 웃긴다. 웃는다는 것은 비웃는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비웃는 것이 아니고 웃겨서 웃는 것이다. 

     

 니체가 재미있다. 니체는 웃음을 건강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웃음이 지혜와 결합해서 즐거운 학문이 된다고. 그러니 웃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니체를 향해 웃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보고 웃는 자를 지혜로운 자로 니체는 이해한다.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를 향해 웃는 자. 웃음으로 견고한 세상의 제방을 무너뜨리는 자를 추천한다. 지금 나의 웃음도 웃음은 웃음이로되, 니체 때문에 웃는 것이다. 말하자면 니체의 ‘터무니없음’이 재미있어서 웃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웃기는 생각을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니체는 이 또한  허용한다. 그것이 니체의 매력이다.     


니체는 ‘네가 나와 다른 말을 하더라도 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는 자신의 가치체계 역시 하나의 해석이요. 관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나의 부당함이다’라고. 부당하고 부당하지 않아서, 낯선 이물감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돌연 이 낯선 역겨움의 이끌림을 따라가 보고 싶어서. 니체가 나를 웃게 한다. 니체의 자유정신 말이다!     


어느 순간 나는 자유인이 되어 '진리로부터 우러나오는 새로운 웃음’을 웃을 수 있을까? ‘웃음의 새로운 미래’    

이야기가 곁길로 샜으나 고귀함과 비속함에 대한 니체의 주장이 재미있다. 처음의 시, 포겔 프라이 왕자는 ‘바람을 타고 솟아올라 날개를 젓는 것을 사랑한다.’ ‘목표와 항구를 잊고 노래와 익살, 가곡 연주를’ 듣는 자유로운 새, 포겔 프라이 왕자. 그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다. 이 자유정신은 고귀한 자의 천성이다. 정신적 거리를 품고 있는 자. 딱딱해진 것에 균열을 내는 자. 웃는 자.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사랑하는 자는 고귀한 자가 된다. 사랑하는 자는 충동에 이끌리는 자로 목숨을 내놓고 사랑을 지키려 한다. 니체는 사랑 또한 이기적인 충동이며 소유욕의 다른 말일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소유욕이며 이기적인 충동이며 이는 고귀한 정신의  천성이라고. 즉 소유욕과 사랑은 동일한 충동의  두 가지 이름이다.    


“소유에 대한 갈망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동경하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독점을 원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무조건적 권력을 원한다. 그는 홀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 안에 최고의 대상, 가장 갈망할만한 대상으로서 머물며 상대방을 지배하려 한다. (... )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른 모든 연적들을  영락하게 하고 배제하여 세상의 모든 ”정복자“와  착취자 중에서 가장 가차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용이 되려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결국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세상의 다른 것들 전부가 무의미하고, 창백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질서도 침범할 수 있고, 어떤 이익도 무시하게 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성애의 이 거친 소유욕과 불의가 모든 시대에 걸쳐 찬양되고 신격화되어왔다는 것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바로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이기주의의 가장 솔직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나온 사랑의 개념이 이기주의의 반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가 아닐 수 없다 ”

                                                                 -니체, <같은 책, 14>    


 사랑은 이기적인 충동이다! 니체는 고귀한 천성의 인간이 충동과 힘의지로 비롯된 삶의 고통을 감당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위험한 사랑일지라도 사랑하기를 바란다. 고통을 즐기는 삶을 살기를. 흔히 삶을 고해라고 말하듯 니체 역시 ‘비극의 삶’을 인정하지만 이 삶을 긍정하라고 주문한다.         


오 놀라워라! 아직도 날고 있는가?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날개는 쉬고 있다니!    

무엇이 그를 떠받쳐주는 것일까? (...)                          

-니체, <즐거운 학문, 알바트로스 중>        


무엇이 알바트로스의 비상을 떠받쳐주는가? 충동이다. 고귀한 자의 이기심이다.(인간말종의 이기심이 아니다!) 니체에게서는 고귀한 자의 이기심과 비속한 자의 이기심이 다르다. 고귀한 자의 이기심은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건강한 이기심이다. ‘그것이 알바트로스를 높은 곳에서 날갯짓하지 않고 날면서 쉬고’ 있게 해 준다.        

고귀한 인간은 자연적 본성을 거세하지 않는다. 고귀한 인간은 상승하는 자다.  ‘진리의 규준’은 힘 상승의 느낌에 있다!            


이성?-그것은 어리석은 것:    

이성과 혀는 자주 걸려 넘어지지!

(...)    

그러니 내 주위에 둘러앉아,    

내 지혜에 귀를 기울이려무나,    

아름다운 새들이여!    

-니체, <즐거운 학문, 포겔 프라이 왕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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