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리 Feb 28. 2023

식탁 위의 도화지

두부 예찬


새하얗지 않으면서도 새하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것’.

이것의 색은 하얀색보다는 아주 옅은 노란색에 가깝다.

촉감은 그때그때 다른데, 보통은 말랑 탱글 찰지다. 보관하기에 따라 쫄깃해지기도 하고 퍼석해지기도 한다.

조리하기에 따라서 식감은 더욱더 다양해진다.


식탁 위에 이 도화지를 펼칠 때면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 선택지가 너무 많아 고민하게 된다.

밑바탕을 간장으로 칠 해볼까, 아니 고추장으로 칠 해볼까?

간장이 됐든 고추장이 됐든 그 위로 색색의 대파, 당근, 마늘, 양파 등을 더하면 그림이 더욱 풍성해진다.


어떤 재료들로 덧칠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그림이 될 수 있는 이 식재료는 바로 ‘두부’다.


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두부의 단순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정 반대다.

일단 콩을 불리는 데까지는 쉬워 보인다. 불은 콩을 갈고 체에 거르는 순서부터 슬슬 손이 가기 시작하고, 체에 걸러진 덩어리들을 꼭 짜 콩물과 비지로 나눈다.

콩물에 물을 더 넣고 저어가며 끓인다. 간수를 넣고 젓다가 덩어리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불을 끈다. 콩물을 면포에 붓고 무게가 나가는 무언가로 꼭 눌러 물기를 빼면 두부가 완성된다.

글로 보아도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더 어렵고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나도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¹⁾를 통해서만 보았지 직접 두부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채식을 하면서 가장 자주 먹게 된 식재료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두부다.

이전에는 두부(콩)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이렇게 다양한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 시절 급식에서 나오는 두부 요리를 떠올려 보면 메뉴가 매우 한정적이었다.

국에 든 네모난 두부, 두부 부침, 가끔 나물반찬에 버무려 나오는 으깨진 두부, 플라스틱에 포장된 연두부. 그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엄마가 해주던 두부요리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고, 김치찌개에 든 넓적한 두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되돌아보니 어떤 식재료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내 식탁에 오르는지, 어떤 식재료가 내 몸을 구성하게 할 것인지, 나에게 어떠한 영양소를 주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무심했던 시절이다.


무심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채식을 시작하면서 두부 요리의 세계도 열렸다.

두부가 메인이 아닌 밥상에서, 두부가 메인인 밥상으로.

채식을 하면서는 이전보다 먹거리에 훨씬 관심이 많아졌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들로 내 몸을 채우기를 원하기도 하고, 동물을 먹지 않기 위해 꼼꼼히 체크해야 하니 관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두부를 더 알고 싶어 찾아본 자료⁽¹⁾에서 콩을 삶거나 볶아 먹으면 영양분의 60%를 흡수할 수 있는 반면, 콩을 두부로 만들어 먹으면 식물성 단백질을 무려 95%나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는 이마를 탁 친다. (그러니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은 어떡하냐는 말 이제 하지 말아 주세요. 충분히 섭취하고 있답니다!)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부요리는 튀긴 두부 봄동 샐러드이다.

그냥 푹푹 떠먹어도 맛있는 두부를, 튀겨 먹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봄동을 깨끗이 씻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귤도 뚝뚝 썰어 같이 넣는다. 견과류도 있으면 추가한다. 거기에 물기를 빼고 전분 가루를 묻혀 바삭하게 튀긴 두부를 올리고 오리엔탈 소스를 뿌려 먹으면…

아직 추울 때 봄을 기다리며 먹는 메뉴인데, 이 상큼한 조합을 입에 가득 넣고 씹으면 이미 화사한 봄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나의 논비건 친구들 모두가 특별히 맛있다고 칭찬한 마라 두부.

마라소스에 대해 호불호가 나뉠 수 있긴 하지만, 싸르르 얼얼한 마라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다.

마라 두부에 넣는 재료로 쓰이는 두부는 일반 모두부, 포두부, 말린 두부, 얼린 두부 등. 어떤 두부를 넣어도 맛있다.

일반 모두부를 넣으면 두부에 있는 물기 때문에 살짝 순한 맛이 되고, 포두부나 말린 두부, 얼린 두부를 넣으면 소스가 두부에 한껏 배어나 더 강렬한 마라 맛을 즐길 수 있고, 쫄깃한 식감까지 더해진다.

이 요리는 조리방법도 쉽고 간편해서 꽤 자주 해 먹는다.

파기름을 내고, 각종 채소들을 볶다가 두부를 넣고, 물도 조금 넣는다. 끓기 시작하면 마라소스2, 간장1, 맛술1을 넣고 졸인다. 소스가 재료들에 배어들고, 자작하게 졸아들면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맛있게 먹는다.

위 재료들에 떡만 추가하여 같은 레시피로 조리하면 그게 바로 마라 떡볶이! 별미가 된다.


추운 겨울날 자주 찾게 되는 국물 요리에도 두부가 빠질 수 없다.

미역국에 들깨가루를 풀고, 순두부를 으깨 넣으면 한 끼 든든하게 먹을 수 있다.


김밥 중에 두부 김밥은 포만감이 최고여서 한 줄만 먹어도 든든하고, 유부김밥은 소스가 유부에 한껏 배어있어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에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은 두부로 만든 면도 나오던데 보통 플라스틱 통에 담겨 유통되고 있어서 장 볼 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사서 조리해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외식할 때 한 번 파스타에 두부면을 쓴 걸 먹어 본 적이 있다. 얇지만 꼬독꼬독한 식감이 재미있었고 파스타 소스도 잘 묻어나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친구가 포두부에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조금을 뿌린 뒤 오븐에 구워 과자처럼 내주었는데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포두부에 손이 가요~ 어디서든 맛있게~ 누구든지 즐겨요~ 구운 포두부! (0심 00깡 광고음악 패러디임을 눈치채 주는 분들이 계시길..)


이렇게 다양하게 지지고 볶고 해 먹으려면 두부를 자주 구매하게 되는데 두부는 살 때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딸려온다.

두부를 직접 만들어 먹으려면 엄두가 나질 않으니, 쉽게 쉽게 사 먹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데 부엌 한편에 자꾸만 쌓여가는 플라스틱 두부포장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동물을 먹는 것만큼의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몇 해 전에 보틀라운지에서 용기내 캠페인⁽²⁾의 일환으로 무포장 가게들을 소개할 때에 백련시장에서 즉석두부를 포장 없이 구매할 수 있다는 걸 보았다.

그래서 몇 차례 그 두부집을 찾았다가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도보로 편도 40분) 집 근처 두부집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실패를 겪긴 했지만 드디어 찾았다. 국산 콩으로 만든, 무포장으로 구매할 수 있는 두부가게를!

백련시장보다는 가깝지만, 고개를 넘어 최소 25분은 걸어가야 하는 여전히 먼 이 가게. 하지만 맛이 특출나기 때문에 이 두부를 위해 기꺼이 고개를 넘는다.


작년 6월, 처음 방문했던 날엔 오후시간이었다.

‘사장님- 두부를 여기에 주실 수 있을까요?’하고 내가 가져간 반찬통을 내밀었더니 두부를 이미 포장용기(플라스틱)에 다 담아 놓아서 따로 담아 줄 수 있는 두부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있는 순두부를 하나 사면서

‘사장님 혹시 그럼 제가 용기를 가져와서 사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고 여쭈어보니

오전 10시 30-40분쯤 오면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을 해주셨다.

그때 두부를 소분해 담는 시간이라고.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은 연두부는 포장 없이 구매가 불가능하다. 만들 때부터 통에 넣어 굳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렇구나~ 오예! 좋았어! 열 시 반. 열 시 반!’


다음 방문에 오전 10시 반에 꼭 맞추어 가서 용기에 모두부 담아 오기를 성공했다. 그날은 너무 신이 나서 옆에서 구매를 고민하는 손님께 여기 두부 진짜 맛있다고, 종류별로 다 먹어 보았는데 다 맛있었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강력 추천을 해버렸다. (참고로 나는 내향형 90%의 인간동물이다.)

‘그래요?’ 하시더니 모두부 한 모를 구매해 가셨다.

용기는 한 번 내면 그다음은 더 쉽고, 더 즐겁다. 이 구매 후기를 블로그에 적었더니 어떤 분께서 자신도 이 두부집에서 두부를 구매하는데 다음번 방문에는 용기를 챙겨서 가보겠노라고 댓글을 남겨주셨다. 두부 덕분에 느끼게 된 연결감! 참 감사한 일이다.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통을 챙겨 들고 언덕을 넘어 시장에 가는 일이 퍽 쉽고 즐거운 일인 것만은 아니지만 기분은 무지 좋다. 플라스틱 쓰레기 없이 맛있는 두부를 사 올 수 있으니까.


시간과 체력이 허락할 때면 통을 챙겨 이 두부집을 찾지만, 여전히 쉬운 쪽(슈퍼나 마트에 파는 두부)을 선택할 때가 잦다.

그래서 올해는 포장 없는 두부를 사 먹으러 언제든 출동할 수 있게 체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우리 이번 년에는   두: 부를 위해 좀 더

                                부: 지런해지면 어떨까?




———————————————————————————————————————————————————————————

1. KBS, 콩의 선물, 두부, 다큐여행, 2017. 11. 25.

2. 음식이나 기타 물건들을 포장할 때 나오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개인 용기를 지참하여 용기에 포장해 오는 사회운동.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 아닙니다. 봇짐의 민족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