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되어 있던 짠내
여행을 마치고 와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가
왜 그토록 동남아에서 아꼈을까 하는 점이다.
결혼 전, 그러니까 한참 서로를 알아가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쓰던 시절.
내가 본 남자 친구는 씀씀이가 넉넉했다. 나에게 쓰는 돈은 헤프게 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 예쁘다' 하고 지나간 가방을 며칠 안에 깜짝 선물로 들이밀고, '친구가 아이패드랑 키보드랑 연결해서 쓰는데 진짜 멋지더라' 하고 뱉은 말에 생일 선물로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선물했다. 옷을 사야 한다며 백화점에 가서 서슴없이 40만 원이 넘는 가죽재킷을 일시불로 긁고 20만 원짜리 바지를 사 입는다. 남자 친구가 듣던 헤드셋을 들어보니 주변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 들렸다. 베이스음의 '둥' 하는 소리가 가슴까지 울렸다. '하루만 빌려주면 안 될까?' 말하자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나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알게 된 헤드셋은 40만 원에 달하는 비싼 제품이었다. 남자 친구를 보고 생각했다.
' 잘 사는구나. 부자다.'
결혼 후, 중학교 때 샀다던 반팔티는 목 라인과 팔이 다 늘어나 수명을 다한 채 남편 몸에 입혀져 있다.
명품 브랜드를 나보다 더 빠삭하게 알던 그가 가장 애정 하는 메이커는 디키즈(Dickies)였다.
남편은 검소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피커, 카메라,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결심하고 나서 남편은 더 알뜰해졌다.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도 체력 향상을 위해서
개인 PT는 받았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좋은 것으로 샀고 돈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여행은 마라톤이다. 긴 일정에 맞춰 예산을 정하고 계획에 맞게 돈을 지출해야 한다.
여행 후 우리의 예산은 숙박비 포함 2인에 5만 원이다. 여행 첫 루트가 동남아였던 우린 앞으로 갈 길이 멀기에 그 계획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아낄 수 있다면 최대한 아껴 여행했다. 여행 중 마주하게 된 남편은 알뜰함을 넘어 짠돌이가 되어있었다.
한국에선 칠천 원은 줘야 마실 수 있는 아보카도 주스가 천 원인 데도 한 잔을 사서 나눠 마셨다. 밥은 거의 노점에서 먹거나 패스트푸드를 먹었다. 음식점에서 밥과 함께 음료를 시키는 건 큰 사치라고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음식점에서 콜라를 시켜 먹을 수 있다고 세뇌되었다. 한국처럼 물을 공짜로 주지 않는 식당에서 결코 물을 사 마실 수 없어 밥을 꾸역꾸역 먹고 나와 슈퍼로 향해 갈증을 해소했다. 늘 배가 고팠다. 이천 원짜리 볶음밥도 하나를 시켜 나눠 먹었고 음식은 배불리 먹는 게 아니라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그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고 이런 곳에서 안 먹는다고 했는데 어느새 적응해 노점에서 밥을 먹고 또 그마저도 나눠 먹고 있었다. 여행 경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식비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다 보니 하루 예산이 조금씩 쌓여갔다.
스스로 잘 해내고 있다고 다독였고 언젠가 나에게 보상이 오겠지. 아낀 만큼 보답이 있을 거야. 최면을 걸어가며 버텼다. 하지만 내가 남편이 설계한 여행 예산에 맞춰 잘 이겨 낼수록 남편은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참고 견뎌내다 터지고 말았다.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는 나는 유독 아침밥에 더 목숨을 건다. 그날도 무척 배가 고팠다. 든든하게 먹고 싶었는데 남편이 1200원 하는 오믈렛을 먹자고 선수 쳤다. 양은 적고 맛도 없고 계란 껍데기가 자꾸 씹히던 싸구려 오믈렛... 그 맛을 알기에 고추장이라도 가져가 비벼 먹어야지 생각했다.
가게에 도착해 남편이 주문을 하고 테이블에 앉아 오믈렛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믈렛이 '하나'만 나왔다. 계란 후라이 크기만 한 오믈렛 한점... 왜 나는 여기까지 끌려와 이 노란 덩어리 한 점마저 마음껏 먹을 수 없을까..
참아왔던 서러움의 폭발, 눈물, 욕설... 이른 아침, 오믈렛 전투를 계기로 나는 든든한 아침을 먹을 권리를 쟁취했다.
만약, 우리가 좀 더 넉넉한 예산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모든 싸움의 원인은 늘 금전적인 문제에서 출발되었다. 우리의 동남아 여행은 너무나 "저렴"한 여행이 되어버려 아무리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추억을 만들어도 머릿속엔 먹지 못 하고, 좋게 자지 못한 기억들 뿐이다.
"아낌은 미덕"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동남아 여행 중 깨달았다.
여행 중 남편의 고백을 들었다.
가죽재킷을 살 때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고...
여행의 초반엔 모든 것들이 서툴러 티격태격 많이도 싸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많은 불협화음중에 가장 삐 소리가 심각했던 음이 바로 "지갑 사정"이었다. 물론, 동남아에서 매일마다 근사하게 먹었어도 우리의 경제사정에 큰 부담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아내가 말한 세계여행은 마라톤이라는 말처럼, 초반에 힘을 다 쓰기보단 골고루 체력 분배를 해야 했고, 나는 괜히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아내가 답답했다. 사실 고정지출(숙박, 이동 등)을 빼면 가장 큰 지출은 다름 아닌 먹는데서 나갔기 때문에 나에겐 한 끼 한 끼 예산에 맞춰 먹어야 한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이 강박적인 생각은 고스란히 아내의 먹는 즐거움을 앗아 가야만 했다.
아내 말대로 우리가 예산이 더 많았더라면 어땠을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럭셔리하게 세계일주를 했다면 좀 더 유익한 여행이 됐을까?
내 대답은 NO다. 그렇게 퍼팩트한 여행을 했다면 우리가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부분을 인지하고 때로는 대화로, 때로는 싸워가며 알아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 여행은 가장 큰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24시간 계속 붙어 다니며 가장 저렴한 음식을 찾아 헤매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서 같이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엔 나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컸었다.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와 결혼해서 함께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과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후회 없는 과거를 만들기 위해 아내의 손을 잡고 저렴한 "인생 맛집"을 찾아 골목길을 헤맨다.
여행 막바지에 아내의 고백을 들었다.
여행 중 동남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