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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과의 만남 Dec 05. 2019

민법 제145조, "법정추인"

제145조(법정추인)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에 관하여 전조의 규정에 의하여 추인할 수 있는 후에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으면 추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의를 보류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전부나 일부의 이행  2. 이행의 청구  3. 경개  4. 담보의 제공  5. 취소할 수 있는 행위로 취득한 권리의 전부나 일부의 양도  6. 강제집행


오늘 공부할 내용은 ‘법정추인’의 개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추인의 개념에 대해 공부해 왔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사례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철수가 영희에게 “나와 결혼해줘”라고 청혼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희는 그에 대해서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얼굴을 붉히며 철수가 내민 장미꽃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 경우 영희가 직접 “결혼을 승낙하겠다”라는 의사표시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상 영희가 장미꽃을 받아들인 것은 결혼을 하겠다는 묵시적인 의사표시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방금 사례는 법률행위에 대한 내용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만, 법률행위에 대해서도 바로 이와 같이 ‘묵시적’이라는 개념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떠한 행위를 하면, 사실상 암묵적으로 추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 명시적인 추인의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추인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적인 추인의 경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법에서는 제145조에서 “이러이러한 행위가 있으면 이는 추인이 있는 것으로 본다”라고 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법정추인(법률로 정해져 있는 추인)이라고 합니다.

이와 비교하여, 제143조에서 추인권자가 하는 추인을 임의추인이라고 부릅니다. ‘임의’와 ‘법정’의 차이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들어 보셨으니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요?


그럼 하나씩 법정추인의 사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참고로, 아래에 제시되는 6개의 법정추인 사유는 모두 취소사유가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여야 한다는 점,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전부나 일부의 이행

누가 무엇을 이행한다는 걸까요? 취소권자가 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인 철수가 동네 컴퓨터 판매점에서 컴퓨터를 구입하는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을 한 다음날 철수는 19세가 되어 민법에 따라 성년자가 되었습니다(취소의 원인 소멸). 성년자가 된 철수는 이 계약을 취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구입대금 80만 원을 가게 사장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처럼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계약)으로부터 발생된 채무("철수는 가게 사장에게 계약에 따라 80만 원을 지급하여야 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한 경우("80만 원 또는 그 일부를 가게 사장에게 건네는 것")에는 사실상 추인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철수가 컴퓨터 매매계약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계약을 취소했을 겁니다. 그런데 취소하지는 않고 구입 대금을 주었으니, 이는 철수의 행동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행을 직접 한 경우뿐 아니라 이행을 받은(수령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추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년자가 된 철수가 컴퓨터 가게 사장이 넘겨준 컴퓨터를 군말 없이 수령한 경우에도 추인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학계의 통설은 취소권자가 채무를 이행한 경우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이행을 수령한 경우도 제145조제1호의 법정추인 사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습니다(백태승, 2021). 예를 들면 위의 사례에서 철수가 성인이 된 후, 컴퓨터 가게 사장이 컴퓨터를 보냈는데 철수가 이를 수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행의 청구

누가 무엇을 청구한다는 걸까요? 마찬가지로 취소권자가 채무의 이행을 청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 철수가 그동안 모아 놓은 용돈 80만 원을 이미 컴퓨터 가게 사장에게 선지급한 상태이고, 아직 컴퓨터는 수령하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성년이 된 철수가 컴퓨터 가게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컴퓨터를 왜 이렇게 늦게 보내 주는 건가요? 당장 배송해 주세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사실상 철수가 계약을 추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취소권자가 채무이행을 청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취소권자가 아닌 상대방(위의 사례에서는 컴퓨터 가게 사장)이 전화를 걸어, “빨리 80만원 부쳐라.”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이행의 청구에 해당되지 아니합니다.


3. 경개

아, 낯선 단어가 나왔습니다. 경개(更改)는 '고칠 경'에 '고칠 개'의 글자를 씁니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겁니다. 경개는 계약의 일종으로서, 채무의 중요 부분을 변경하여 이전의 채무를 소멸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채무를 성립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제500조(경개의 요건, 효과) 당사자가 채무의 중요한 부분을 변경하는 계약을 한 때에는 구채무는 경개로 인하여 소멸한다.


채권 관계에서 채무자가 A라는 사람에서 B라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면, 이는 채무의 중요한 부분이 변경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A가 채권자에게 이행하여야 할 채무를 소멸시키고(이전 채무의 소멸), 대신 B가 채권자에게 채무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새로운 채무의 성립) 경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 철수는 컴퓨터 가게 사장에게 80만 원을 지급하여야 할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년이 된 철수가 컴퓨터 가게 사장에게, "지금 우리 집에는 현금 80만 원이 없으니, 창고에 넣어둔 오토바이로 대신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컴퓨터 가게 사장도 오토바이가 마침 필요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 경우 채무의 중요한 부분이 변경된 경개가 이루어져, 80만 원을 갚기로 하는 채무는 소멸되고 대신 오토바이를 주기로 하는 채무가 성립되게 됩니다. 이러한 경개가 있었던 경우에는 철수(취소권자)가 사실상 컴퓨터 매매계약을 추인한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한 감이 있는데 경개의 개념은 채무인수, 채권양도 등 채권법의 여러 법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서 이러한 부분들을 설명하지 않고 공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경개란 법정추인의 사유가 된다', 이 정도로만 알도록 하시고, 심화된 학습을 원하는 분들은 민법 교과서의 채권편을 공부하시면 되겠습니다.


4. 담보의 제공

담보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뭔가 상대방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담보를 요구합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이런 겁니다. 취소권자가 담보로 물건을 걸어 둔다든가 하는 행동을 취한다면, 이는 사실상 취소권자가 추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암묵적으로 추인하려는 의도가 없으면 담보를 제공하는게 아니라 취소권을 행사하였을 테니 말입니다.


5. 취소할 수 있는 행위로 취득한 권리의 전부나 일부의 양도

표현은 좀 긴데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성년이 된 철수는 계약에 따라 컴퓨터 가게 사장에게 컴퓨터를 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채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철수가 컴퓨터 구입 계약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철수의 친구가, "나도 사실 그 컴퓨터가 필요하다. 값을 잘 쳐줄 테니 그 컴퓨터는 내가 받아쓰면 안 될까?" 라고 합니다.


철수가 이에 동의하게 되면 철수가 가진 채권은 그의 친구에게로 양도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철수는 추인의 의사표시를 명시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 계약을 추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계약을 취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야 그로 인한 권리를 남에게 양도할 수 있기 때문).


6. 강제집행

강제집행이라는 개념이 민법에 처음 등장합니다. 사실 이 개념은 민사집행법을 공부하여야 하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간단히만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소송을 경험하고, 또 뉴스로 접합니다. 누군가는 소송을 해서 이기고, 또 누군가는 집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돈을 갚으라는 소송에서 진 사람이 막장이어서 "판결대로는 못하겠다. 난 돈 못 갚는다" 이렇게 우기면 어떻게 될까요? 체포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체포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하는 것이고, 소송에서 이긴 사람 입장에서는 체포고 뭐고 내 돈을 돌려받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이처럼 판결의 후속 절차로서 국가가 공권력을 사용해 판결에서 이긴 사람의 권리를 실현시켜 주기 위하여 강제집행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재판에서 진 사람이 끝까지 돈을 갚지 않고 버티면, 국가에서 그 사람의 재산(주택, 자동차 등)을 빼앗아 그것으로 돈을 마련해 재판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그 절차는 굉장히 길고 복잡합니다만, 여기서는 이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여하튼 철수가 자신이 컴퓨터를 받을 수 있는 채권이 있다면서 그에 대해 강제집행을 해온다면, 이는 당연히 그 계약을 인정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학계의 통설은 취소권자가 채권자로서 강제집행을 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채무자로서 강제집행을 ‘받는’ 경우도 제145조제6호에 포함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송덕수, 2022). 강제집행을 당하는 입장인데 왜 이게 암묵적인 추인이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취소권자가 강제집행을 당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면 강제집행 절차에서 이의를 제기하였을 텐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145조 단서를 볼까요? 여기서는 “그러나 이의를 보류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의를 보류하는 사람은 취소권자를 말합니다. 즉, 취소권자가 “이거 법정추인사유에 해당될 수도 있는데, 이거는 암묵적으로 추인하고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밝히는 것입니다. 사실 법정추인 사유가 대부분 그 법률행위를 인정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제1호부터 제6호까지의 행위를 하면서도 동시에 “이건 법정추인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례가 흔치는 않을 것 같긴 합니다. 뭔가 서로 말이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145조 단서는 입법론상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단서가 적용될 만한 사례도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이의를 보류한다는 것의 의미 정도만 대강 이해하시고, 자세한 학설 논의는 참고문헌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김용덕, 2019). 


어쨌건 법정추인의 6가지 사유가 발생하면, 이제는 추인이 있는 것으로 간주가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3가지 종류의 추인을 공부하였습니다. 표현이 비슷한 부분도 있고 여러 개를 배웠기 때문에 좀 헷갈리실 겁니다. 그래서 내용을 아래와 같이 표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긴 내용을 오늘 공부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은 취소권의 소멸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백태승, 「민법총칙(제7판)」(전자책), 집현재, 2021, 520면.

송덕수, 「신민법강의(제15판)」(전자책), 박영사, 2022, 204면.   



19.12.5. 작성

22.12.15.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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