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뜻 Apr 08. 2021

사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사랑을 기록하는 것을 미루지 않고




    "전화에 불 난다, 불 나!"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인 전화를 받으며 버럭, 장난스레 소리쳤다. 휴대폰 너머로 엄마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왜애~ 걱정되니까 그렇지. 머쓱한 뒷말도 따라붙는다. 요즘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특별한 용건이 있을 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아무 이유 없이 걸 때가 많다.


    아침에는 일어났는지 전화가 온다. 점심에는 점심 먹었는지, 먹었다면 무얼 해 먹었는지, 혹시 시켜먹은 건 아닌지, 안 먹었다면 왜 이 시간까지 안 먹고 있는지를 물어본다. 오후 세시쯤에도 어김없이 전화가 온다. 뭐하는지 궁금하단다. 나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한다. 그냥 누워있다고. 그럼 누워서 뭐하냐고 물어본다. 그럼 또 대답한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가 조금씩 질 무렵에는 저녁은 언제 먹을 건지 물어본다. 그럼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저녁을 준비한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냉장고에는 엄마가 넣어주고 간 김치가 전부이기 때문에 대충 김치볶음밥을 메뉴로 정한다. 저녁을 하는 동안은 동생이랑 부엌에 서서 새로 사야 할 물품이나 식재료들을 고민한다. 독립이라면 첫 독립인만큼 사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나마 엄마가 그릇이나 각종 생필품을 넣어주고 가서 당장은 큰 무리 없이 지내지만 말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또 전화가 와 무엇을 먹었냐고 물어본다. 그날의 메뉴를 말해주면 그 음식에는 이런 걸 넣어야 하고, 어떻게 간을 해야 한다고 설명해준다. 뒤늦은 조언이지만 나는 다음번에는 그렇게 하겠다며 성의껏 대답한다.


    세탁기가 집에 들어온 날에는 연달아 전화가 세 통이나 왔다. 세탁기 들어왔니, 어떻게 설치됐는지 사진 찍어 보내주겠니, 엄마가 놓고 간 세제 고농축이라 많이 넣으면 안 되는데, 수건 빨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에 나는 짜증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다.


    "엄마, 예전에도 다 하고 살았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아이, 너네끼리 사는 건 처음이니까 그렇지!"


    그래서 음식 하는 법도 처음부터, 빨래하는 법도 처음부터 알려주는 거라고. 자식 셋 타지에 보낸 지 10년이 꼬박 지냈음에도 독립은 또 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란 생각을 했다. 또 하루는 전화가 와서 대뜸 용건을 꺼냈다.


    "엄마가 반찬이랑 국 끓여서 보내 줄 테니까 냉장고에 넣어두고 꺼내 먹어. 김치 더 보내줄까?"


    아니이, 김치 많으니까 더 안 보내줘도 돼. 내 말에 엄마는 알겠다 대답하고선 그다음 날 곧장 택배를 부쳤다. 제주에서 온 택배는 바로 다음날 도착했다. 뜯어서 냉장고에 정리하던 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김치 또 보냈는데?


    "또? 누나가 분명 보내지 말랬는데! 아니, 어차피 보낼 거면서 왜 물어본 거야?"


    그러게. 나도 보내지 말랬는데. 동생이랑 나는 엄마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행각에 한참을 웃었다. 본가에서 보낸 반찬과 국을 냉장실, 냉동실에 나눠담으니 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이제 좀 사람 사는 집처럼 채워졌다.


    오늘은 엄마가 보내준 국을 데워서 먹었다. 국을 데우며 동생과 나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끓인 뼈해장국 속에는 뼈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엄마가 손으로 살코기를 다 발라서 보낸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 왜 귀찮게 다 발라서 보냈냐 물으니, 우리가 치우는 게 더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랬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동생에게 말했다. 그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또 어딨겠냐고. 무뚝뚝한 동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우리는 퇴근하고 들어온 오빠에게 엄마표 음식들로 저녁상을 차려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가 이거 다 발라서 보낸 거다? 그리고 진짜 맛있어. 오빠는 꺼낸 반찬과 국, 밥을 모두 다 깨끗이 비워냈다. 오늘따라 밥이 왜 이렇게 맛있냐면서.


   철없는 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사실 엄마가 읊어주는 레시피를 그렇게 귀담아듣지 않는다.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어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엄마의 손길을 배우다 보면, 그 모든 것이 엄마와의 이별을 대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엄마가 없을 때 이렇게 하면 된다는, 엄마 없어도 이렇게만 하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그러나 나는, 바깥에서는 한없이 똑똑하고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도, 엄마 품에서는 마냥 어린애로만 남고 싶은 철부지라서 그게 못내 슬프다. 엄마의 사랑에 마냥 기뻐하기보다 그 사랑의 부재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 당신의 대체할 수 없는 사랑에 감탄하면서도 그 대체할 수 없음에 불안해하게 되는 것이.


    엄마가 아니면 하루 종일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을 내 휴대폰. 엄마가 아니면 아무렇게나 돌아갔을 세탁기. 엄마가 아니었으면 텅 비었을 냉장고와, 엄마가 아니면 일일이 손으로 발라야 했을 뼈해장국. 엄마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았을 이 공간의 온기, 엄마가 아니면 새길 수 없었던 사랑의 표식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종종 먼 훗날 우리들의 이별을 상상하면서 눈물 지을 테지만, 그 슬픔에 무력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일지도 모를 이별에 오래 슬퍼하기보다, 언제라도 이별을 씩씩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나갈 것이다.


    그 준비라는 건, 당신이 전화를 걸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일, 당신이 물어보기 전에 저녁상을 찍어보내며 잘 챙겨 먹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당신은 무엇을 먹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일, 당신이 정성으로 끓여준 국을 매일같이 맛있게 먹어주는 일, 언제나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당신께 먹고 싶은 반찬을 투정 부리는 일, 당신의 사랑에 지치지 않고 응답해주는 일, 그 사랑에 못지않은 사랑을 보내주는 일.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미루지 않고 기록하면서,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생생하게 당신을 떠올리는 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