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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뜻 May 24. 2021

3시 28분의 기적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이미 학점 이수는 지 오래지만, 아직 사회에 나가기가 겁난다는 이유로 졸업 요건을 채우지 않은 지 바야흐로 1년. 슬슬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료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어중간함을 이제는 탈피해볼까 싶었기 때문이다. 본전공은 이전에 보았던 공인 영어시험 성적표를 제출하기만 하면 되었고, 이중전공은 교내에서 시행하는 한자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졸업을 못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한자 시험이 예년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에 있었다. 기존 한자 시험은 시험 전 특강이 늘 열렸고, 그 특강을 바탕으로 공부를 한 후 대면 시험을 보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올해 한자 시험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시험이 진행될 예정이며, 특강도 없다는 공지가 떴다. 심지어 비대면 시험 방식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방식인 터라 혼란스러움은 가중되었다.


※ 개인 기기 설정, 네트워크 연결 문제, 사용 방법 미숙지 등으로 인하여 정상적으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는 경우에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별도의 구제방안은 없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지 하단에 적힌 문구를 보니 어쩐지 오싹한 기분까지 든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슬금슬금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사용 방법 미숙지로 응시를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싶어 사전에 시험을 위한 프로그램을 깔고, 실행이 되는지를 테스트해보았다. 공지에 적혀있는 안내를 차근차근 읽어가며 하니 생각보다 복잡한 절차는 아니었다. 남은 건 시험 직전까지 최대한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잘 풀고, 잘 찍고, 제출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다.


    시험 당일. 시작 15분 전 화상 캠을 켜놓고 학교에서 안내한 시험용 브라우저를 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브라우저가 로딩만 되는 상태로 열리지를 않는 것이었다. 전날 시행했을 때는 금방 열렸던 것 같은데, 왜 이러지. 일단 시간 여유가 있으니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1분…, 3분…, 5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로딩 표시만 뜨는 화면을 보고 내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우스를 딸깍거리자 '응답 없음' 창이 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지만 최대한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해보려 했다. 화상캠은 돌아가는 중이고, 50명의 학우들과 감독관이 언제든 날 볼 수 있으니까. 단축키로 프로그램을 강제 종료시켜보려 했지만 강제 종료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노트북을 껐다 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재부팅한 뒤에 다시 화상캠을 켜고, 브라우저를 열려고 했다.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게 다시 노트북 재부팅만 세 번하는 동안 이미 시험은 시작되었다.


    나는 결국 화상 프로그램에 들어가 감독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브라우저 접속이 안 되어 시험 응시를 못 하는 상황인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껐다가 켜보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이미 세 번이나 해보았다고 했다. 잠시 후에는, 개인 노트북이나 네트워크 문제이므로 문의 메일을 직접 보내야 한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시험은 3시였고, 그때 시각은 3시 20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그 순간 시험을 보지 말까, 라는 생각이 불쑥 치고 들어왔다. 이미 나는 30분이 넘도록 노트북과 씨름하는 중이었고, 지금 당장 전산실에 메일을 보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입장 마감인 30분까지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친 마음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하지 말까.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민을 하다가, 다음 시험에도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원인이라도 알아보자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들어 메일을 적기 시작했다. 여전히 노트북 화면은 시퍼런 로딩 창만 떠있는 상태였다.


    참담한 심경으로 상황에 대해서 써내려 가고 있던 중에, 문득 시야에 걸리는 게 있어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켠 브라우저가 천천히 열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완벽히 열린 사이트 화면을 보고 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8분. 촉박하긴 하지만 아직 시험 응시가 가능한 시각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시험 응시 탭에 들어가 응시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시험지가 펼쳐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험은 엉망으로 보았다. 남겨진 30분 안에 100문제를 풀어야 했고, 한자는 너무 깨알 같은 글씨로 나와 제대로 분간이 안 되었다. (확대를 하는 방법이 따로 있음은 나중에 알았다) 물론 공부도 만족스러울 만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보기 봤지만 어쩐지 이번 학기에 졸업을 못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썩 유쾌했다. 어쨌든 나는 시험을 보았고, 완벽히 제출까지 마쳤기 때문이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거짓말처럼 일이 진행되었고, 결국은 포기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해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봐도 일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일 때, 내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가 없을 때. 그럴 때면 문득,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때때로 하고자 했던 일일 때도 있고, 그것을 위해 애쓴 시간일 때도 있고,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들고만 바보 같은 나일 때도 있다.


    "훌륭한 인재시지만 아쉽게도…."


    오늘 오전 또 한 번의 인턴 면접 불합격을 알리는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아주 잠시 막막한 감정을 느꼈다. 왜 나는 이렇게 어려울까? 한다고 되는 걸까? 계속 시도해보면 뭐가 다를까?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고 씩씩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불쑥 찾아드는 자괴감과 좌절감에 한참을 이불 안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러다 어제의 28분을 생각했다. 응시 마감 직전, 안 될 것이라며 포기하려던 찰나에 결국은 내게 열렸던 그 인터넷 창을 생각해냈다. 어찌 되었든 시간 안에 100문제를 모두 풀어서 제출까지 마쳤던 나를 생각해냈고, 그 순간 내가 가졌던 안도감과 뿌듯함을 생각해냈다. 아, 그래도 계속 켜 두길 잘했다, 계속 시도해보길 잘했다, 하고 다행스러워했던 순간을.


    "원래 수학이 그래. 지금 당장은 안 느는 것 같아 보여도 나중에 보면 갑자기 껑충 실력이 뛰는 때가 와, 진짜로."


    과외를 하던 때에 아이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믿고 계속하다 보면 결국은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생각해보면 그랬다. 수포자의 길을 잠시 고민했던 내가, 어느 날부터는 수학 과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두 팔을 모아 배구공 튕기는 수행평가를 하던 때 단 세 번도 못 튕기던 내가, 평가날에는 몇십 번을 튕겨내 만점을 받았었다. 대학 수시 원서 6개 중 5개를 줄줄이 떨어졌지만 결국 마지막 남은 한 원서가 합격이라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내가 있었다. 인터넷 강의 한 편을 대여섯 번씩 반복하면서 겨우 익혔던 나, 두 팔에 멍이 잔뜩 들어가면서 연습했던 나, 대학 면접 지문을 달달 외워가면서 준비했던 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바로 내가.


    이윽고 나는 이불 밖으로 나온다. 묵은 마음을 털어내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머리를 묶은 다음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책상에 앉아서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한다. 그래, 생각해보면 면접까지 간 것도 장해! 조금쯤 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북돋아주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또 한 걸음 나아갈 마음이 생긴다.


    살아가며 또 한 번 마주칠 나의 3시 28분. 마지막에 펼쳐지는 새하얀 화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잠을 청하기로 한다.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기꺼이 마주하겠다는, 또 한 번의 용기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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