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뜻 Dec 17. 2021

'실수'를 지불하고 탄 버스

우리는 결국, 그 길의 끝에서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알게 된다




    "죄송합니다아…."


    적막한 사무실에 잔뜩 기죽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어코 대형사고를 치는구나, 내가. 분위기상 평소와 같이 웃어넘길만한 실수 수준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모니터를 말없이 응시하던 팀장님은 건조한 투로 입을 떼었다. 일단 정정 메일 보내시고요…. 싸늘한 표정에 이미 잔뜩 쫀 나는 대답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넵, 네엡. 넵… 죄송합니다.


    곧장 자리로 복귀해 정정 메일을 보냈다. 보낸다고 수습될 일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착잡한 심정으로 메일을 보내고 나니 이미 시각은 밤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비록 야근을 했지만 일을 다 마무리하고 간다는 뿌듯함이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말미의 실수가 주는 타격이 너무 컸다. 더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는데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내가 왜 했을까, 그냥 빨리 퇴근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국 피해만 주는 사람이 됐구나, 하는 그런 자책들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실수해놓고 울기까지 하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


    무거운 사무실 공기를 벗어나자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평소같으면 사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회사와 관련된 생각은 OFF 해뒀을텐데, 오늘만큼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정류장에 앉아서 가만히 곱씹자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심한 실수 그 자체였다. 한 번만 다시 확인했어도 벌어지지 않을 일. 평소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합리화하고 넘길 수 있을 텐데 일을 꼬이게 했다는 죄책감은 합리화의 히읗도 꺼낼 수 없게 했다.


    '춥다'라는 단순한 감상조차 끼어들 틈이 없도록 실수를 곱씹고 있던 찰나 타야 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터덜터덜 버스에 올라탔다. 늘 그랬듯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껴야 하는데 마음이 심란하니 노래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팀장님의 굳어진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퇴사를 코앞에 두고 함께 일하는 이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고 속상했다. 여태 열심히 했던 모든 시간들이 물거품 됐는데 탓할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렇게 30분쯤 자책과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면서 갔으려나. 대뜸 큰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빨간 옷 입으신 분, 어디 가세요~?"


    버스기사님이었다. 잠깐의 정적 이후, 내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 한분이 혹시 당신한테 물어본 거냐며 대답하셨다. 기사님은 허허 웃으면서 말을 이으셨다.


    "네~ 아까 전에 동대문에서 타셨는데, 한 바퀴 돌았는데도 자리에 계셔서요~"

    "나 마포 가려고 하는데, 이거 마포 가는 거 아니에요?"

    "동대문에서 마포는 반대방향으로 타셨어야 해요~"

    "아이구, 그래요? 아휴, 난 그것도 모르고 한참 앉아있었네."


    버스 방향을 반대로 탔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안 할머님은 아휴, 어떡해 하면서 자책을 하셨다. 그럼 어떻게 마포로 가냐는 질문에 버스기사님은 친절히 답변을 주셨다. 이번 정류장은 반대편 정류장까지 거리가 멀어서 가기 힘드실 테니, 다음 정류장에 내리셔서 반대편 정류장으로 가시면 된다고. 할머님은 고맙다고 말씀하시면서 뒷말을 이으셨다. 엉뚱하게 탄 줄도 모르고 한참을 왔다면서, 바보가 따로 없다고. 할머니의 한탄에 기사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말을 이으셨다.


    "이런 날 바깥구경도 하고 그런 거죠. 가시던 길 말고 다른 길도 보시니까 좋지 않으셨어요~?"

    "아휴, 그래도…."

    "내려서 버스 다시 타면 마포도 금방 가실 수 있으니까 너무 그러진 마셔요~"


    기사님의 말에 할머니는 그제야 스스로에게 혀를 차던 것을 멈추셨다. 대신에 기사님과 똑같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기사님과 할머니 사이에 앉아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가만히 기사님의 말을 곱씹었다.


    잘못 탄 건 맞지만, 그래도 그 덕에 다른 길을 보아서 좋지 않았냐던 그 말을. 다시 내리면 원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던, 그 말을.


    그건 꼭 금방까지 스스로의 잘못을 몇 번이고 생각하며 자책하던 나에게 해주는 말 같기도 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단 한 번의 후회 없이 삶을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걸 받아들인 후에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삶의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나는 버스기사님의 말을 빌어 실수를 향한 나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늘 가던 방향이 아니라서, 알던 길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울 수는 있지만, 가끔은 반대로 가보는 것도 꽤 특별한 일일지 모른다. 언제나 오른편에 있던 것들이 왼편에 있을 때는 어떻게 보이는지, 언제나 오르막이던 길을 내리막으로 걸어보는 건 또 어떤 기분인지, 언제나 붐비던 거리 그 반대편의 한산함은 어떤지. 이러한 광경, 느낌, 경험들을 어쩌면 나는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혹시 버스를 잘못 탔다는 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눈치채더라도 고개를 숙이지 말아야지. 발끝만 바라보지 말고 더 넓은 앞을 봐야지. 펼쳐진 더 많은 걸 눈에 담아야지. 그건 우리에게 아주아주 중요한 걸음이 될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지. 우리는 결국, 그 길의 끝에서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걸.


    하지 않던 실수를 했고,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늦게 버스에 올라탔고, 마음이 무거워 평소와 달리 노래를 듣지 않았던 오늘. 그 버스에 운명처럼 올라타서, 운명처럼 노래 말고 기사님과 할머니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어떤 큰 깨달음을 지고 하차를 한 것처럼, '실수'를 지불하고 탄 버스에서만 볼 수 있는 게 분명 있다. '실수'만이 실어다 주는 앎의 길이, 분명 있다.

이전 08화 3시 28분의 기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