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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26. 2019

벌레 인간과 별똥별 사랑

소외와 박대에 대한 저항

벌레 인간과 별똥별 사랑

‘벌레 콤플렉스’라고나 할까요? "송충이 같은 놈!"이라고 하면 누구나 싫어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벌레 취급당하는 것을 무지 싫어합니다. 졸지에 '하찮은 미물'이 되어 소외와 박대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벌레콤플렉스'는 거의 집단무의식에 속하는 것일 겁니다. 그 대표적인 소감(所感)이 카프카의 『변신』일 겁니다. 어제까지 한 가족의 중심이었던 존재가 갑자기 벌레로 변한 뒤 겪는 소외와 박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요. 그 반대 게이스가 '외계인', '미래에서 온 사람'일 겁니다. 벌레 인간과는 아주 상극적 패턴입니다. 초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거의 원초적인 동경 심리가 인간들에게는 있습니다. 근자에 인기를 끈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나 <도깨비>가 그 대표적인 것이 되겠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벌레콤플렉스'라는 집단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소외와 박대'에 대한 공포가 그런 식으로 좀 과격하게 반영된 드라마라는 것이지요. 극과 극은 가깝다고 했으니 ‘무능과 미숙의 벌레’와 ‘전능과 성숙의 외계인’은 동전의 서로 다른 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는 이런 ‘비인간화 동경(憧憬)’ 현상을 두고 자본주의의 대두 앞에서 느끼는 소시민의 공포(몰락공포)를 그런 식의, 벌레가 되거나 외계인이 되는, 극과 극의 판타지 로 표현해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소시민들에게 자본은 애초에 없는 것이고,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잃는 순간 자신이 ‘벌레’로, 해충으로, 갑자기 변하는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변신』이라는 소설은 담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별에서 온 그대>나 <도깨비>는 ‘같은 원인의 다른 결과’이고요.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그저 인간 안에 있는 본능적인 그 무엇(원초적 자기 방어 본능)을, 각각 상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는 비극으로 하나는 희극으로 재미지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이라고만 여겼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나 벌레나, 외계인이나, 오십보백보, 우주의 먼지이기는 매 한 가지가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고요. 그런 ‘극단적인 것을 통한 고찰’을 통해서 인간됨의 허구와 인간의 위선, 혹은 나약함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한 소설이나 드라마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본주의’니 ‘소비사회’니 ‘피로사회’니 하는 말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보니 설명이 좀 달라집니다. 결국은 모든 게 다 ‘자본주의’ 탓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젊은 소설가의 젊은 소설을 한 편 읽어보겠습니다. 저희 나이가 되면 젊은 사람들의 언어를 수시로 접하면서 ‘머리 운동’을 정기적으로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감수성 치매 예방에 효험이 있거든요. 아쉬운 것은 통째로 직접 보는 일이 힘에 좀 부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제 ‘예심’을 거쳐온 작품만 읽어도 눈이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거기다 예심자가 자기 취향에 바져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황당 시츄에이션’을 만나면 눈이 많이 피곤합니다). 다른 것보다도 눈이 오래 견디질 못합니다. 언제나 그쪽에서 먼저 무너집니다. 감수성 치매 예방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조만간 이 생활도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젊은 비평가가 리뷰한 ‘젊은 소설’ 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핍이 있잖아. 그런데 왜 그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섀도우는 세 가지를 바르면서 여러 사랑을 함께하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지? 왜 꼭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다 채울 수 있다고 자만하는 거지? 사실 그럴 수 없잖아. 내가 미처 채울 수 없는 부분, 다른 사람이 대신 채워주면 어때서? 난 상관없다고 했어. 누구를 만나든 말든. 솔직히 말해서, 여럿 사랑하는 게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잖아? 왜, 여행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옷은 이것저것 입으면서, 책도 이 책 저책 읽고 싶은 거 읽으면서, 음식도 한 가지만 먹으면 입에 물린다고 난리면서, 그런 게 사람의 욕망이란 걸 빤히 알면서,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되는 건지, 왜 그게 용납되지 않는 건지, 정말 모르겠더라고. [이홍, 『걸프렌즈』, 안미영, 『소설, 의혹과 통찰의 수사학』, 17쪽에서 재인용]


작중 인물(현주, 다른 여자에게 애인을 빼앗김)에게 사랑은 섀도우, 여행, 옷, 책, 음식과 동급으로 취급됩니다. 여행처럼 그때그때의 ‘기분’와 ‘형편’에 따라 목적지가 정해집니다. 섀도우나 옷처럼 언제든지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교환할 수 있고, 책이나 음식처럼 ‘흥미가 떨어지거나 물리면’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그렇게 언제나 ‘소비’될 수 있는 것입니다(애벌레 인간이란 뜻일까요?). 그 결과 자신이 ‘소비의 대상’이 되었을 때도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서 주인공인 스물아홉의 한송이(<별그대>의 천송이가 생각납니다)는 좀 덜 ‘소비적’입니다(그녀는 고치로 발전된 단계일까요?). 그녀는 유진호라는 남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그에게 곁을 주지 않습니다. 상처를 나누지 않는 ‘소비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녀는 남자를 만날 때 지키는 몇 가지 수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가족 얘기는 삼간다. 둘째, 싸이월드에 함께 직은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셋째, 과분한 선물은 하지 않는다. 넷째,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다.”가 그것입니다(고치 인간의 삶의 방식인가요?). 이를테면 ‘벌레들의 연애“, 나르시시트 에로티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행태이지요. “적당하게 즐기다 헤어지는 것이 남녀간의 만남이지 않느냐, <별그대>서와 같은 ’별똥별 사랑‘이 어디 있느냐”는 것을 전제로 하는 ‘소비사회의 연애’인 셈입니다. [이상, 안미영, 『소설, 의혹과 통찰의 수사학』 참조]


<별에서 온 그대>나 <도깨비>가 왜 공전의 히트를 치고, 만리장성을 넘어 대륙에까지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지 이제 그 전말이 좀 보입니다. 서로 나누는 ‘소통’은 없고 쓰고 버리는 ‘소비’만 있는 ‘피로사회’의 허전함을 그것이 많이 달래주었던 모양입니다. 그저 보호막 치고 그 안에서 상처받기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젊은 연인들에게는 그들의 시공을 초월하는 ‘거침없는 사랑’이 그렇게 보기 좋았던 모양입니다. 한갓 ‘벌레’에 불과한 줄 알았던 인간의 사랑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뒤흔들 만큼 위력을 지닌다는 게 그렇게 좋았던 모양입니다. 초능력 중의 초능력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라는 메시지(판타지 중의 판타지)가 또 그렇게 좋았던 모양입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랑의 위대함’이 거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천송이(한송이는 안 되는 모양이죠?) 같은 타고난 복덩이(도민준이 그녀에게 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겠죠?)들에게만 내려오는 축복이라면 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고 억울합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미스 트롯의 송가인처럼 갑자기 '벌레인생(죄송합니다!)에서 그 자신 '별똥별 사랑'으로 위대한 변신을 하게 될 날이 내게도 생길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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