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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6. 2023

소설, 레드빈 케이크 1

레드빈 케이크(1)     


레드빈 케이크(Red-bean Cake), 단팥빵, 적두병은 내 최후의 결론이다. 칼 융 식으로 말한다면 내겐 적두병은 모든 '죽음의 유혹'에 대한 반항이다. 일테면 모든 갈라진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는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이다. 

“살아있는 상징은 핵심적인 어떤 무의식적 요소를 형태화하는 것이다.”라고 융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적두병은 완벽하고 완전한 내 개인적 상징이다. 상징은 상징이므로 모호한 암시와 풍성한 관념들을 서로 연결해 준다. 그렇게 해서 지상의 모든 고립을 하나식 깨부순다. 상징은 궁리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그것은 ‘자발적 산물’이므로 항상 ‘폭로자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인이 되기 전, 내게 완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는 오로지 토성(공원) 앞에서 보낸 6~7년 간의 기간뿐이다. 나머지 기간은 억압되거나 파편화되어서 제대로 기억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토성 앞에서 (赤豆餠) 간판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사막에서 우주선을 만나 것처럼 황당하고 황망스러웠는지도 몰랐다. 내 무의식이 마구 요동친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팥떡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사전을 찾아 확인하면서도 한동안 어리벙벙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일이 적두병 서사의 구축이었다. 일단 적두병 가게의 주인이 화상(의 후예)일 것이라고 유추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적두병 가게를 연 이유를 핏줄의 연에서 찾겠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꺼냈더니 아내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다는 게 아내의 말이었다. 그런 게 아내의 세계관이었다. 세상을 엮는 가장 명확하고 질긴 끈은 돈(물질적 욕심)이라는 게 아내의 신념이다.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까지라는 거다. 언제든지 훅 불면 날아가는 것들이라는 게 아내의 믿음이다. 그런 아내에게는 나는 항상 넘치는 인생이었다. 

보통은 내가 물러선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무의식의 요동이 확인되었던 일이다. 쉽게 뒷걸음쳐 지지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시류에 맞지 않게(나도 이 소설의 제목을 레드빈 케이크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쓰고 있지 않은가?) 굳이 적두병이라는 한자 상호를 쓰는 까닭은 다음 둘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아주 교활한 발상이거나 아니면 아주 단순한 연유에서였다. 교활하다면 이 남루한 토성공원 앞의 풍경들에 스며들기 위한, 그리고 그런 역삼투압으로 젊은이들의 레트로 취향을 자극하기 위한 영업전략일 것이고 단순하다면 내가 생각하는 혈연의 작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가게 주인이 중국인일 것이라는 내 추리가 충분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같은 세태에 누가 그런 고색창연한 간판을 내걸겠는가. 진짜 중국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반동을 저지를 리가 없는 것이다. 고도의 영업전략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러기에는 가게가 너무 초라했다. 

그가 중국인의 후예임이 분명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젊은 주인의 적두병 제조 기술이 범상치가 않았다. 우연히 그의 적두병을 처음 맛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의 기술이 내림 기술임을 알아채렸다. 당대에 보고 배운 기술과 대를 이어 내려온 기술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법이다. 그가 만든 적두병은 무언가 오랜 장인의 숙성된 기술이 배어있었다. 가히 이상적이라 할 만큼 팥소와 껍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팥소에 견과류를 첨가해 팥의 지나치게 강렬한 특유의 자극적인 향미를 견제하면서 씹을수록 은근하고 깊은 식감을 내도록 배려하고 있는 점이 좋았다. 모르는 이들은 팥소의 단맛에서 적두병의 맛이 좌우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단맛만으로는 식감을 풍성하게 할 수 없다. 팥의 물성이 차기 때문에 그것과 어울리는 따듯한 물성을 배합하는 일도 꽤 중요한 과정이다. 껍질을 파삭하게 구워서 먼저 따듯하게 고소한 맛을 내고 이어서 시원한 단맛이 뒤따라오는 순차적인 식감의 조화를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따뜻하고 시원한 맛'이라는 게 실제 온도와는 별개의 식감이라는 것은 모두다 알 것이다. 거기다가 적두병은 견과류를 첨가해서 팥소가 혼자 놀지 않고 은근하게 고소한 뒷맛과 함께 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팥의 시원하고 달콤한 향미를 음미하면서 물리지 않고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팥소를 쓰는 고급 전병 유(類)가 지켜야 할 금과옥조였다. 팥소의 습기가 오래 유지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아마 계란과 우유를 활용해서 최대한 팥소가 마르는 시간을 늘리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닌데 적두병은 잘 해내고 있었다. 겉을 싸는 식재(食材)의 풍미도 결코 일류 제과점의 그것에 밀리지 않았다. 가성비로 볼 때는 다른 업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제품이었다. 사소한 요령에서부터 명장(名匠)의 확고한 신념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적두병이었다. 이 난국에서도(토성공원 앞도 조만간 젠트리피케이션의 질풍노도가 덮칠 것이다) 몇 년째 가격을 올리지 않는 불패의 상도(商道)까지 고려한다면 적두병은 틀림없이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그것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렵게 자수성가한 부친의 삶을 기념하고 추수하려는 중국인 2세의 작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추리도 아닌 추리는 매사에 호들갑을 떠는, 당신 같은 ‘팥쥐’들의 생각일 뿐(팥쥐는 항상 생각이 많다는 게 아내의 주장이다)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적두병에 대한 나의 품평 태도부터 평가절하했다. 입맛은 간사해서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내 몸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몇 번의 입질로 그 맛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한 상 차림도 아니고 고작 ‘한 입 먹거리의 호사’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작가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눈치까지 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땅에서의 화교들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좀더 정치하게 정치경제학 쪽으로 이해를 넓힌 다음에 입질을 해도 하라고 나무랐다(아내의 형부가 화교다). 이 땅의 화교들이 제3공화국 시절의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저곳으로 이산(離散)한 것을 모르느냐는 거였다. 그렇게 떠난 지가 언젠데, 무엇이 자기를 부른다고 그 비루하고 강퍅한 토성공원 앞에 손자까지 나서서 다시 전을 펴겠느냐는 설명이었다. 재산 취득과 관련된 법령이 개정되어 외국인도 내국인과 별반 다름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짧은 상식을 동원해 반박도 해 보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내의 적두병에 대한 평가가 전적으로 그런 사회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서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체를 하니까 그렇게 면박을 준 것이었고 사실은 아내의 적두병 품평은 주로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주요 재료인 팥이나 견과류가 그 가격으로 볼 때 국산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맛에 있어서도 유명 제과점 특히 일본 여행에서 맛본 나마까시(和菓子)들과는 아주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였다. 그리고 영업 환경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이었다. 위생 상태가 불량하다는 거였다. 아내의 데이터에 의거해 적두병과 가게 주인을 분석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저 토성공원 앞에서나 맛있게 먹을 정도의 작은 팥빵’이었다.

그게 콩쥐다운 생각인 것은 분명했다(아내는 나의 팥쥐 기질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그러나 콩쥐들은 세상을 즐길 줄 모른다. 좋아하는 팥소가 가득 든 적두병을 보고 호들갑을 떨지도 못한다면, 그렇게라도 마음대로 환상 속에 들어가 마음껏 공상도 즐기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 세상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이 지루한 인생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콩쥐처럼 일만 하고 산단 말인가? 콩쥐에게도 밤생활은 필요했다. 가족 부양 같은 주어진 임무에만 목을 매고 사는 건 결국 소나 말, 개나 당나귀의 삶이 아닌가? 비록 자정까지만 딱 유효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쥐가 끄는 호박마차 한 대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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