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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6. 2023

소설, 레드빈 케이크 3

레드빈 케이크(3)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金閣寺)』가 어떤 경로로, 어떤 연유로 내게로 온 것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 근방의 기억이 몽땅 통째로 지워졌기 때문이다(일종의 섬망이다). 내게는 그렇게 통째로 지워진 기억이 몇 개 있다.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조각들을 맞추어서 기억을 복원해야 한다. 소설 금각사를 만나기 전, 세계의 비참 속에서도 난생 처음 보는 황홀한 미감(美感)을  나는 만났다. 그렇게 갑자기, 도적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황홀경은 그 이후로 다시 없었다.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것은 한 번 있었다. 40대에 막 접어들 무렵, 영화 <동방불패> 한 장면이 그 아류적(亞流的) 느낌으로 나를 흔든 적이 한 번 있었다. 내 안의 아니마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정도(degree)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kind)의 차이가 존재했다. 모르긴 해도, 소년기의 황홀경은 예술적 영감의 세계와 첫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종의 세계와의 첫 사랑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하나의 계기적 사건이었다. 그 세계와의 첫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금각사'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하나의 극단(極端), 하나의 종결, 하나의 섬광(閃光)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환상' 그 자체를 보여준다. 소설 『금각사(金閣寺)』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소설이 왜, 어떻게, 내게 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것만 누락된 것이 아니다. 그 앞뒤의 사건 전체가 다 통째로 기억에서 지워져 있다. 일종의 섬망(譫妄, 부분적으로 기억이 상실되는 증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내게는 그런 부분 기억상실이 몇 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등학교 입학 무렵이다. 1~2년 사이의 기억이 원형탈모증처럼 여기저기가 비어 있다. 그 무렵 금각사가 내게 온 것만 기억한다.

내가 읽은 『금각사(金閣寺)』는 삼중당 문고판이다. 지금도 내 서가 한 구석에 얌전히 얹혀져 있다. 아마 여름방학 때쯤 읽었던 것 같은데 당시로는 줄거리를 포함해서 무엇 하나 뚜렷하게 감동적인 게 없었다. 소문처럼 대단한 작품은 아니었다. 사건도 지루했고 문장도 별로였다. 그때는 유미주의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미주의는커녕, 내 경험 자체가 그 어떤 의미화도 이루어지지 않던 때였다. 세계와의 첫사랑이 내 안에서 영그는 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금각사가 하나의 문학적 황홀로 체험되는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였다. 당연히 처음 금각사를 읽을 때에는 미시마의 죽음의 방식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글을 쓰고 있는데 뉴스에서 마광수 선생의 자살 소식을 전한다. 스카프로 목을 매었다는 전언이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충격이 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택한 죽음의 방식이 할복(割腹)이라는 전통적인 사무라이식 자살이었고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공허감을 처리하는 피할 수 없는 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 들었다. 그대는 그런 생각보다는 어쨌든 살아서 할 일이 많을 나이에, 타고난 재능도 남다른 그가 굳이 그런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지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인생은 어차피 허무의 바다다. 그 안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쳐야 하는 게 인간의 운명일진대 꼭 그런 방식이었어야 했는지 안타까웠다.

그의 유미주의, 그의 환상이 공감되기 시작할 때가 내 문학적 성년기였던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는 가장 잔혹했던 전쟁을 관통하며 살았다. 반복되는 공포, 고통, 비굴, 비참에 중독된 삶이었다. 그것들이 행사하는 폭력을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남은 삶은 그 자체로 자학(自虐)에 중독을 선사했고 그는 자학 중독을 끊기보다는 자기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의 중독 증세를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라는 말로 요약했다. “나중에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쟁은 에로틱한 시대였다. 지금 항간에 범람하는 지저분한 에로티시즘의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모아져, 정화되던 시대였으니 <중략> 전후는 나에게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모습뿐이며, 공감할 만한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중략> 1970년 11월 25일, 최후의 소설 『풍요의 바다』 제4부를 탈고한 후, 그는 자위대 이치가야(市谷) 주둔지에서의 할복자살이라는 거창한 연극으로, 모든 이들을 삼등석으로 몰아넣으며, 장렬하게 삶을 마감했다.( 김항, 「천황과 폐허 : 상승과 하강의 벡터」, 『문학동네』, 2004, 봄, 참조)

그를 ‘미친 자’로 치부할 수도 있다. 신이 그에게 쥐어준 하나의 작은 인형(人形)을 안고 제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스스로 대오에서 낙오한 자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죽음의 인형을 안겨준 자가 신이었다면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숙명 중의 하나다. 끝까지 가서 비루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나 중도에서 파열음을 내며 파국을 자초하는 것이나 모두 인간의 숙명일 뿐이다. 걷는 길의 차이일 뿐이다. 종착지는 다 같다. 어느 길로 걷느냐를 두고 저주하고 욕하고 비웃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 하나, 그런 인형 하나 없이 사는 인생이야말로 ‘알몸으로 구걸하는’ 인생이라는 것, 그리고 너무 오래 구걸하다보면 자기가 거지라는 것을 아예 까먹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 작가는 구걸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비루한 것 앞에서는 “나는 작가다. 거지같다”(김이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의 '세계와의 첫사랑'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다. 

내가 최초로 '거지 같은' 유미주의적 경험, 그 최초의 세계와의 조우를 경험하게 된 것은 열 다섯 살 때였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3월에 어머니를 여의고 두문불출, 공부에만 열중한 덕분에 악동으로 호가 났던 불미스런 과거는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교육관에 따라서 우리는 3년 내내 같은 반 급우들과 헤어지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그때 친구들과의 일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혼자서 공부하는 게 너무 심심하니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하며 같이 공부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나도 많이 외로웠던 터라 선뜻 응했다. 친구집은 M시의 전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몇 채 남아있던 꽤 큰 적산 가옥 중의 하나였다. 북쪽으로 대문이 있고 남향으로 안채가 앉아 있는 전형적인 왜옥인데 마당에 큰 연못까지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었다. 집은 큰데(온돌로 개조한 안방과 다다미방이 서너 개 있었고, 화장실도 따로 썼다) 식구는 어머니, 가정부, 친구, 여동생, 그리고 큰 개 한 마리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배를 타시는지 그 집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근엄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분이었다. 친구는 어머니를 많이 닮아서(외모와 성격이 다 그랬다) 진중하고 말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생이던 여동생은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였는데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같이 먹을 때만 볼 수 있었다. 한 번씩 무용 실력을 뽐내고 싶었는지 나 보란 듯 한쪽 다리를 들어서 옆얼굴에 척하고 갖다 붙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친구가 동생을 나무랐다. 대문 안쪽에 묶어두는 큰 개는 성질이 꽤나 사나웠다. 나만 보면 사정없이 짖곤 했다. 끝까지 나를 식구로 인정하지 않았고 헤어질 때까지 몇 달 동안 나와는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서너 달이나 지났을까? 하루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오던 귀갓길에서 '세계와의 첫사랑'을 한 바로 그날이었다. 보통은 친구와 함께 오고갔는데 그날은 혼자였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친구 어머니에게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친구 어머니의 표정이 크게 어두워지면서 눈빛마저 흔들렸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으시던 분이 그렇게 심란해 하는 건 좀 의외였다.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시면서 한숨까지 내쉬는 거였다.

“어휴~, 오늘은 날이 참 이상하네. 두 명이 함께 나가는구나.”

그렇게 말했다. 사정을 알고보니 내 마음도 좀 이상해졌다. 그날 우리가 등교를 하고 난 뒤 그 사나운 개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가 안 보였다. 개 짖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마음이 급해서 개집이 비어 있는 것을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무엇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어머니는 크게 상심하는 듯했다. 개가 죽은 것과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한데 묶어서 어떤 나쁜 징조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날 있었던 '세계와의 첫사랑'은 다음과 같다. 그날 하굣길에서였다. 그 친구 집으로 가려면 M고등학교 앞으로 난 좁은 축대길을 지나야 했다. 이제하 소설 「태평양」에 그곳 정경의 한 편린이 묘사되어 있다. 

    

...학교는 시(市)의 서북쪽에 있는 학산(鶴山) 비탈 숲 밑 양지쪽에 자리 잡고, 거의 전 시가지와 부두와 예배당 뾰족탑과 바다를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DDT 무더기가 본관과 별관 건물 모퉁이 이곳저곳에서 햇볕에 허옇게 타고 있었고, 그 귓속을 후비는 듯한 소독 냄새와 함께 채 깨지지 않은 유리창들이 대공(大空)을 향하여 눈이 시도록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제하, 「태평양」, 『초식』, 민음사, 1973, 36쪽)    

 

동란이 끝나고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던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수업을 할 수 있었던 무렵의 풍경 묘사인데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전망 좋은 자리에 터를 잡은 이 학교에는 정작 명물이 따로 있다. 축대 위 운동장 담을 따라서 열 그루 정도, 장엄히 서 있는 씨알 굵은 벛꽃나무가 그것이다. 아마 이 학교의 역사와 거의 같은 나이를 지닌 고목들이지 싶은데 이 벚꽃나무가 일제히 자신의 여린 살점들을 바다를 향해 날려 보내는 장면이 가히 장관(壯觀)이다. 정말이지 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몇 가지 조건이 제 때 갖추어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니 매 년 정기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꽃 필 때 봄비가 자주 내려서 꽃잎을 미리 떨구어서도 안 된다. 낙화 시점에 때맞추어 산 위에서 바다 쪽으로 힘찬 바람이 불어줘야 한다. 그래야 꽃잎들의 화려한 집단 비행이 가능하다. 바람 부는 시간도 중요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음껏 쓸 수 있는 때여야 최고의 미장센이 가능하다. 제대로 된 낙화 장면을 보려면 가히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그날도 친구집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이었다. 친구집은 M고등학교의 높은 축대가 끝나는 길 건너에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M중학교에서 M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급한 오르막길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 중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새뗀가 싶었다.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들이, 반짝거리는 수많은 작은 날개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바다를 향해 떼 지어 날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서 연분홍 벚꽃들이 화려한 군무(群舞)를 펼치고 있었다. 바람의 회전을 따라서 한 번씩 원무를 그리기도 했다. 일사불란하게, 공중을 유린하며 함께 움직였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저 시커먼 몸통에서,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 있던 가여린 연분홍 살점들이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멍한 심정이었다. 아 이렇게 세상이 아름답구나라는 생각이 어디선가 나를 찾아들었다. 하늘은 눈이 시도록 맑았고 내 눈에서는 예고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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