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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y 13. 2022

성실한 방문객


통증이라는 말은 너무 아프게 발음된다. 말할 때마다 조금씩 더 아픈 것 같다. 모든 아픈 말은 더 부드럽게 바뀔 필요가 있다. 

나의 통증은 정기적인 것이다. 추운 계절에는 한 달에 서너 번. 한 번에 이삼 일씩. 날이 따뜻해지면 그 절반 정도. 나는 통증 속에 있다.     


의사는 갸우뚱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요. 일단 꾸준히 운동을 좀 해 보세요. 나는 네, 하고 불신과 체념이 섞인 대답을 흘린다.

십여 년 전 런던에서 선배의 게스트하우스 일을 도왔다. 매일 여행객들을 마중하고 그들의 짐을 옮겼다. 비가 오던 날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부실한 계단을 오르다 처음으로 골반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영어도 짧고 돈도 없어 병원을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통증은 성실한 방문객처럼 찾아오는 것이었다. 

통증의 방문은 제일 먼저 런던에서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꼬박꼬박 그러는 탓에 오래된 기억들은 귀퉁이도 낡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가난했고 치졸했고 실패자였으며 소외되고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금방 어느 정도 그때의 내가 되면 어깨가 한 층 더 내려앉는다.     


울먹이는 하늘이 비가 올 것을 알리듯이 통증에 앞서 마음이 먼저 울적해진다. 이상하게 침울하다 싶으면 곧이어 허리 아래가 뻣뻣해진다. 시작은 언제나 마음이 먼저다. 

다음 날 아침쯤 되면 틀림없이 한쪽 골반이 돌처럼 굳어있다. 나는 몸통과 다리의 연결 지점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곳이 늘 고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가는 구체 관절 인형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내 다리도 몸통으로부터 분리될 것 같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덜그럭거리는 다리를 챙기며 움직여보려 한다. 앉아있다가 일어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발만으로 잠시라도 땅을 딛기 어려워서 한 발씩 교차해야 하는 걸음의 법칙이 새삼 어려워진다. 차라리 인형이라면 힘껏 다리를 돌려 뺏다가 다시 끼우고 싶다.     

 

나는 아프지는 않고 그저 느린 사람처럼 굴며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낸다. 지난번 학교에서 ‘예민한 우리 엄마’에 대한 글을 쓴 아이가 ‘툭하면 아픈 엄마’라는 글은 쓰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다. 아이가 가면 비로소 마음 놓고 아프다. 바른 자세로 누워 오늘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한다. 드물게 약속이 있었다면 취소하고 청소도 빨래도 미룬다. 분리수거도 할 수 없고 머리를 감는 일도 어려울 것 같다. 누워서 책 보는 일, 고양이 밥을 챙기고 나도 간단한 간식을 꺼내 먹는 일 정도가 남는다. 통증으로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억울하다. 홀로 붙들린 나를 빼고 죄다 자유롭다. 세상에는 나 모르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몸을 돌리면 생각도 함께 돌아눕는다. 그래도 죽고 사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곧 없던 일처럼 사라지는 통증은 행운이다. 끝을 아는 고통은 충분히 무르다. 고작 약간의 부자유, 참을 수 있는 만큼의 아픔, 약속된 기다림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좋아지겠지. 시간은 가던 대로 가 주고 나는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될 것이다. 나풀나풀 걸어갈 때,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내 머리카락의 향기가 맡아질 것이다. 나는 웃을 것이다. 풀과 꽃을 볼 것이고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뛰어갈 것이다. 

조금 서둘러 내일이라도 나아진다면 좋겠다. 오늘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내일의 나를 나는 벌써 좋아한다. 내 욕심은 오직 내일 하루에 있다.     


아직 오후가 되려면 멀었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 시선도 속도를 맞춘다. 천천히 볼 때 생각도 조금 더 머물다 흩어진다. 종이 위의 글씨도 책장도 천천히 넘어간다. 창밖에 풍만한 구름도 서두르지 않는다. 분침은 게으르고 고양이의 하품이 잦다. 느린 것들이 원래 이렇게 많았나. 통증만 잠시 잊는다면 지금 세상은 무심한 어른의 작은 다정 같다. 나는 아이처럼 편안하다.     


낙담과 낙관, 불안과 위안을 오가며 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 하루의 시간은 너무 성긴 탓에 틈새가 많다. 통증은 틈마다 고개를 내밀고 내게 자꾸 말을 건넨다. 너는 나약하다 헛되다 그리고 혼자다. 넌 너무 혼자야. 조롱이며 염려인 말들이 새어 나오는 그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다.      


평소라면 혼자에 대해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와 둘만으로 늘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은 잼 뚜껑이 열리지 않거나 여름밤에 날아든 벌레를 잡아야 할 때 나 말고 누구 없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만 빼면 정말 그랬다. 한 사람의 필요가 잼 뚜껑을 열고 벌레를 잡고 아픈 뒤에야 떠올릴 수 있는 정도라면, 그것은 오히려 존재가치에 대한 폄하 아닐까. 게다가 필요한 사람이 꼭 ‘당신’인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나 또한 여태 누구라도 상관없는 필요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에 결국 홀로 누워있게 된 걸까. 

    

생각은 침대 발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없게 된 집안은 너무 커서 생각조차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 사소한 외침도 끝나지 않는 메아리로 되돌아올 것 같다. 나는 계속 기억을 캐내고 묻고 답한다. 내가 견뎌야 하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여며둔 것이 풀어진 듯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말들이다. 통증보다 먼저 찾아오고 그보다 뒤늦게 떨어져 나가는 우울과 외로움은 이 불쾌한 수다에 대한 예감이자 후유증이다.  

  

날이 허물어질 때쯤이면 나는 항복하듯이, 실은 내가 줄곧 많은 일을 후회한다고 생각한다. 실수였고 잘못이었던 일들, 실수 전의 실수, 그 전의 무능과 부족함. 후회의 연쇄는 끝도 없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는 더 큰 어려움과 아픔에 맞서는 강한 사람이 너무나 많지만, 나도 나대로 늘 이겨내고 있었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다. 나와 속도를 맞추던 세상은 멈추거나 잠긴다. 딱하고 부끄러운 스스로의 연민이 시작된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아프기 싫다. 누구에게 라도 말하고 싶다. 아프니까 빨리 들어와. 그 말이 그렇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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