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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1.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카메라는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둘째 날 #03) 혼자 떠나온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카메라로 이어지다

우도에서 다시 성산포항으로 돌아와서는 카페 [오르다]로 향했다.

아까 우도행 배를 타기 위해 헐레벌떡 여객터미널로 가는 중에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미련이 남아 잠시 들러 몸을 녹이기로 했다.

전망이 좋아 보였으니 운이 좋으면 노을 지는 풍경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왔던 길을 되짚어 카페로 가는 길, 배편을 놓칠까 조급하게 지나갈 땐 안 보이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만 한 밭에는 옹기종기 무가 심겨 있고 저 멀리로 우도도 보인다.




카페에는 맛있어 보이는 빵도 있었지만 아직 뱃속에 뿔소라가 남아있다.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모두 보이는 카페에 앉아 가만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몸을 덥힌다.

곧 해가 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일몰은 볼 수 없었지만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저녁거리도 생각해보고 오늘 하루를 되짚어본다.

이윽고 버스를 타러 가기 전 잘 꾸며놓은 카페 정원을 감상한 뒤 정류장으로 향했다.




원래의 저녁 식사 계획은 동문시장에서 만원 어치 회를 사서 숙소에서 먹는 거였다.

하지만 점심으로 뿔소라와 멍게를 먹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직 배가 안 고프기도 해고 아직 입 안에 바다 향이 맴돈다.

그냥 숙소 근처에서 맥주 안주거리를 사고 숙소 1층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짜리 맥주를 사야지.

다시 버스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제주 시내로 돌아와 [무지개 맥주]에 갔다.

슈가 치즈볼과 먹태를 포장하니 대략 20,000원 정도였다.

묵직한 봉투를 받아 드니 혼자 먹을 건데 너무 많이 샀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숙소 1층 편의점은 CU였는데 충격적이게도 4캔에 만원 행사를 안 했다.

요즘 4캔 만원 행사를 안 하는 곳도 있어? 아까 [무지개 맥주]에서 맥주가 1L에 7,900원이던데 거기서 살 걸 그랬나.

고민하다가 적당히 3캔을 골라 계산하는데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필름 카메라인가?"

"아뇨. 디지털이에요. 필름 같이 생겼죠?"

"필름인 줄 알았어. 나도 사진을 사십 년을 찍었는데. 하긴 요즘은 다 디지털이지. 디지털이 싸."

"맞아요. 요즘 필름 값도 비싸고 현상비도 비싸요."

"옛날에도 필름은 비쌌어. 내가 처음 카메라 배운다고 돌아다닐 때는..."


그렇게 처음 만난 아저씨와 카메라에 대해 이십 분 정도를 수다 떨었다.

아저씨는 젊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 시작했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뒤에는 아이들 찍어주는 재미에 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커서 제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아저씨는 바빠서 사진을 잘 못 찍고 있다며 아쉬워하셨다.

그래서 많던 카메라도 다 치우고 이제는 라이카 한 대 남았다고 한다.

"좋은 카메라 쓰시네요."

아저씨는 내심 기쁜 표정이었다.

내가 장비에 좀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어떤 기종인지, 어떤 특징을 가진 카메라인지 대화했을 텐데 아쉽게도 기계에는 별 지식이 없다.

그래도 아저씨는 오랜만에 옛날 얘기를 한 게 즐거웠는지 흥이 나셨다.

"사진 많이 찍고 조심히 다니고."

"네, 감사해요."

다른 손님이 와서 대화를 마치고 나는 6층에 자리한 내 방으로 향했다.




혼자 카메라를 메고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 카메라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잠시간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사진을 잘 찍을 것 같아 보이는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은 커플 또는 친목도모로 여럿이 여행 온 경우가 많은데 주로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촬영을 부탁한다.

그러면 최대한 열심히 빠른 시간에 여러 장을 찍어 드린다.

다 찍고 핸드폰을 돌려주면 결과물을 보기도 전에 너무너무 만족해하며 혼자 여행 다니는 중이냐,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 등등 여러 덕담과 응원을 해주신다.

그러면 별것도 안 했는데 어깨에 뽕이 살짝 들어간다.

아주 가끔은 그냥 내 카메라에 본인 모습을 담아주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좋은 풍경에 마음이 술렁여서 즉흥적인 부탁을 하는 걸까.


우리 집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이에도 쉽게 다가와서 강아지 나이를 묻고 쓰다듬다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도 그런 점에서 약간 비슷하다.

혼자 떠나온 여행지에서 카메라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렇게 카메라는 여행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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