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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2.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비와 고양이

(셋째 날 #02)비 오는날 김녕미로공원,고양이를 만날 수 있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김녕미로공원으로 가는 길.

차도 별로 없고 사람은 더더욱 없다.

자박자박 걸으면 마음이 평화롭다.




도착한 김녕미로공원에도 사람이 많지 않다.

비가 오는 날 미로는 별로 인기가 없을만하다.

매표소에서 6,000원에 입장권을 구매하고 출입자 명부를 작성하면 직원이 간단한 설명을 해준다.

안내 책자에 미로 지도가 있지만 되도록 미로는 지도를 안 보고 가야 재밌다고 한다.

너무 길을 못 찾겠다 싶으면 그때 펼쳐보라고 한다.

그리고 미로 공원 안에 종이 스탬프와 전자 스탬프가 있는데 종이 스탬프는 안내 책자에, 전자 스탬프는 전용 앱에 모으면 된다고 한다.

꼭 이런 데 승부욕이 생겨서 스탬프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양이 집이 있다.

꽤 여러 마리가 낮잠을 자는 중이었는데 잠자리 외에도 장난감과 사료가 있었다.

더스틴 교수님이 처음 공원을 만들 당시부터 고양이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김녕미로공원은 이제 미로만큼이나 고양이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미로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새집도 있고 아이들 놀이기구나 장난감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맑은 날에는 애들을 데리고 오는 여행객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진 찍기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비가 오기 때문에 고양이랑 눈인사를 하고 곧바로 미로 입구로 갔다.




자신감에 차서 미로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좁은 미로에서 우산이 굉장히 부대꼈던 것이다.

어쩐지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간 커플은 보라색 우비를 갖춰 입었더랬다.

카메라를 들고 있어서 당연히 우산 쓸 생각을 했지 우비 생각은 못했다.

애초에 우비와 카메라 방수 용품을 가져와야 했던 게 아닐까.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을 보며 오늘 남은 일정이 쉽지 않겠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별수 있나.

게다가 마지막 일정은 비 오는 동백동산이다.

비 오는 날 제주 숲길을 포기할 순 없지.

다행히 좁은 미로 틈새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는 와중에도 우산이 잘 버텨줬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다 삼색이 고양이를 만났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철망 틈새로 폴짝 건너와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제주도 고양이들은 비가 와도 개의치 않는 건가?

한참을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고롱고롱하며 좋아했다.

아쉽지만 언니는 종을 울리러 가야 해.




아쉬운 인사를 남기고 한참을 걸었는데 또다시 고양이를 만났다.

같은 곳을 맴돈 거다.

그렇게 고양이를 총 세 번 만났다.

미로에 들어오자마자 길을 잃다니.

처음에는 여유롭게 스탬프를 찍으며 가던 길을 세 번이나 도니 오기가 났다.

대략적인 지형지물과 미로 담장 너머의 풍경을 외워서 길을 찾아 나갔다.

우산이 부러지든 말든 뛰다시피 미로를 도니 금방 종착지인 종까지 도착했다.

대략 삼십 분 안쪽으로 걸린 듯했다.

종이 있는 구름다리에 올라 내려다보니 내가 헤매고 돌아다닌 빽빽한 미로가 보인다.

더스틴 교수님이 손수 땅을 파고 나무를 심어 가꿨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싶다.


전망대에는 비를 피하는 하얀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디가 아픈지 한쪽은 죄다 털이 다 빠져있고 목덜미에 덩어리가 잡혔다.

안쓰러운 마음에 한참을 쓰다듬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미안해.




출구로 나오는데 짓궂은 표정의 나무들이 있다.

미로를 헤매고 나서 보니 괜히 얄밉다.


스탬프는 결국 반 정도밖에 못 모았지만 종을 울렸기 때문에 매표소로 갔다.

종을 울렸다고 말씀드리자 매점에서 엽서 하나를 골라가라고 한다.

김녕미로공원 사진과 공원에 사는 고양이들 사진으로 된 엽서다.

그중에 하나를 고르고 매점을 둘러보니 과자가 잔뜩 있다.

가격을 잘 모르고 봐도 시세보다 훨씬 저렴해 보였지만 뚜벅이에 비 오는 날 과자 박스를 들고 다닐 수 없다.

과자는 마지막 날 동문시장에서 사야지.

김녕미로공원에서 동백 동산까지는 14.1km.

초록 버스가 있지만 엽서 구경하다가 놓쳤다.

다음 배차까지는 삼십 분 남짓.

미로공원 둘러보는데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잡았지만 비가 와서 미로만 급히 돌고 나오니 버스를 애매하게 놓친 거다.

점점 비도 거세지니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다.

매점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탄 뒤 점찍어둔 식당에 전화해 한 명 식사를 문의하자 정식 메뉴라 두 명 이상만 가능하다고 한다.

미리 전화해 보길 다행이다.

다른 곳에 전화해보니 다행히 정식 말고 청국장은 1인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택시 기사님께 목적지를 바꿔 방금 예약한 밥집으로 가달라고 하자 기사님은 흔쾌히 목적지를 다시 네비에 입력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장사하는 사람 100명이 있다고 쳐, 그러면 제주도 토박이는 10명? 아니 손가락에 꼽아. 다 육지 것들이야."

"그런가요?"

"그럼! 육지 것들이 제주도 와서는 제주도 욕만 다 먹인다고."

첫날 저녁의 일이 생각나서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저번 제주 여행 때는 지역 맛집이라는 곳에 갔는데도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저는 저번에 제주 왔을 때 맛나식당이라고 엄청 유명한 갈치조림 집에 갔거든요.

거기서 1명은 식사가 안 된다고 해서 저 혼자 2인분을 시켰어요. 한 시간 뒤에 오라기에 시간 맞춰 가서 기다렸죠. 그런데 예약자를 확인하고 호명하는 아주머니가 저를 빤히 보고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는데도 저 말고 다른 사람들만 들여보내 주는 거예요. 몇 팀이 그렇게 들어가고 이상해서 확인해보니 제 뒤에 사람들도 이미 들어갔어요.

저도 2인분을 시켰는데 다른 사람 두 명은 들여보내 주고 왜 저는 안 들여보내 주나요.

따지니까 그때서야 못 봤다고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혼자라고 말했는데도 밥그릇을 두 개 차려준 거예요. 그게 뭐라고 너무 서러웠어요."

"그거 제주 사람 아니야. 제주도 사람은 장사 절대 그렇게 안 해."

"어제는요. 혼자라고 미리 예약하고 식당엘 갔는데 자꾸 더 시키라고 몇 번이나 와서 메뉴판을 들이밀어서 결국 2인분을 시켰어요. 먹고 있는데 나중에는 빨리 먹고 나가라고 눈치를 주는 거예요."

"그것도 제주 사람 아니야. 하여간 육지 놈들이 제주도 욕은 다 먹여. 육지 놈들이 문제야. 

뭐가 문제냐면 음식값을 죄 올려버려. 제주도에 놀러 온 사람들이 다 그래. 제주도는 만원 주고도 먹을 데가 없다. 무슨 소리야. 제주도에 육천 원짜리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육지 놈들이 만원, 만 오천 원씩 가격을 올려버려. 도새기는 말이야 하도 가격을 올려놔서 어딜 가도 비싸. 이제 우리도 비싸게 먹어야 해."

돼지고기 가격을 올려놨다니 아저씨가 '육지 것'들을 심하게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음식점을 고르는 기준이 딱 3가지가 있어.

첫째, 관광지는 피해. 관광지는 무조건 비싸.

둘째, 인터넷에서 맛집이라고 하면 가지 마. 여기 사람들은 관광객들이 맛집이라고 줄 서서 먹는 거 보면 비웃어. 또 인터넷에서 이상한 거 보고 엉뚱한 데 돈 낭비한다고. 블로그나 SNS 맛집 그거 다 광고야.

그냥 관광지에서 벗어나서 적당히 아무 데나 들어가면 돼.

근데 셋째, 차림표에 가격이 없으면 그냥 나와. 볼 필요도 없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밥 집에 도착했다.

"근데 여긴 어디야. 기사인 나도 모르는 곳인데."

아저씨는 짐짓 이 아가씨가 또 엉뚱한 데를 가는 거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 근방에 밥집이 별로 없대요. 비도 오는데 가까운 데 가야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식당에 들어서자 아주머니 두 분이 맞아주셨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예약한 사람인 걸 바로 알아보셨다.

정식은 두 명 이상만 가능해서 미안하다고 청국장도 맛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저는 청국장도 잘 먹어요."

금방 음식이 나왔고 사진을 찍자 주인아주머니가 상을 차리다가 물어봤다.

"혼자 여행 왔어요?"

"네. 조금 있다가 동백동산 가려고요."

비도 오는데 혼자 여행 왔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는지 아주머니가 숙소는 꼭 안전한 시내에 잡아야 한다며 당부하시며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그러다가 '혹시 괜찮으면 고등어 먹을래요?'하고 물었다.

나는 먹겠다고 했다. 당연히 추가 메뉴를 말씀하시는 거라고 생각했고 밑반찬이 푸짐해서 양이 모자라지는 않았지만 아주머니가 정답게 이것저것 챙겨주시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난 아무래도 정에 약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아주머니가 '먹고 리뷰 잘 써줘요. 공짜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리뷰 잘 써줘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리뷰는 그냥 하는 말이고 사실은 공짜로 주는 거에 부담을 느낄까 봐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같았다.

그렇게 나는 얼결에 고등어를 얻어먹게 되었는데 이렇게 챙겨주시면 도저히 음식을 남길 수 없다.

청국장과 고등어를 다 먹고 밑반찬까지 세 개 정도 빼고 다 먹었다.

세 개는 편식이 아니라 다 먹으면 동백동산을 굴러다녀야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남겼다.

[선흘앤도구리]는 자연식을 파는 곳이라고 했는데 모든 음식이 자극적이지 않았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도 속도 더부룩하지 않았고 따뜻한 밥 한 끼를 잘 먹은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아주머니가 배웅해주셨다.

이 정도면 '엄마 밥상'으로 이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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