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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5.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길을 잃어도 여행이 된다

(넷째 날 #01) 버스를 잘못 내린 곳에 김택화미술관이 있었다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조식을 먹고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오는데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마지막 날의 목적지는 함덕 해수욕장이다.

초록 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거리를 가는데 문득 어제저녁 식사 때 본 뉴스가 떠올랐다.

제주 지역 소식을 다룬 뉴스였다.

내가 다녀온 우도의 하수 방류 문제나 제주 테마파크 건설에 대한 주민들 간 갈등, 그리고 4.3사건 피해자 인터뷰.

주름진 노인의 슬픈 얼굴과 불구된 몸, 떨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뻐근해졌다.


어떻게 그동안 여러 번 제주를 오가며 한 번도 4.3과 관련한 곳을 안 갈 수 있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다시 지도 앱을 본다.

제주를 떠나기 전 4.3 유적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함덕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고 중간에 환승하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어제 버스 기사님께 한 번 혼났기 때문에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이 나온 뒤 조심스럽게 하차 벨을 눌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저씨는 내가 내리려던 정거장의 그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주셨다.

'빨간 버스랑 초록 버스는 룰이 달라?'

황당했지만 겨우 한 정거장 차이니 다행히 환승 버스 편은 비슷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건너편에 전시회가 눈에 띄었다.

지도 앱 리뷰를 보니 안에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고 전시도 호평이 많았다.

전시 11시부터라 아직 개관까지 삼십  정도 남았지만 다행히 카페는 이용할  있었다.

2층에 자리한 카페에는 다양한 미술 작품과 소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미술계 소식을 다룬 도서들이 비치되어 있어 조금 읽어보니 카페에 놓인 작품이 국내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짐작할  있었다.

카페가 마치 전시장처럼 보였다.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주문한 자몽차가 나왔다.

달콤한 자몽차를 마시며 비치된 책을 읽었다.

그중에 [Museum] (기획: 하비에르 사에스 카스탄, 그림: 마누엘 마르솔)이라는 책이 인상 깊었다.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가 길가에 픽업트럭을 세우고 언덕 위 Museum에 들어간다.

건물 안에는 차례로 여러 그림이 걸려 있고 사내는 감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Museum 앞에 세워진 자신의 픽업트럭이 그림에 똑같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곧이어 그림 속 인물이 현실 세계로 걸어 나오고 놀란 거기에 놀란 자신의 모습이 그림 속에 똑같이 있다.

점차 미술관의 그림과 현실 세계가 뒤섞이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그림인지   없어진다. 

미술관에 와서 읽어서 그런지 더더욱 기묘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책을 끝까지 읽고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친구가 생각났다.

선물로 줄 생각에 인터넷 서점에서 같은 책을 주문했다.

좋은 책을 만나면 언제나 기쁘다. 그 책을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카페 내부에 비치된 소품은 모두 멋스럽지만 그 가운데 탁자와 의자가 눈에 띈다.

쪽지를 읽어보니 오랫동안 사용된 목재를 재활용해 만든 가구들이었다.

옥상에 덩그러니 놓은 소품도 멋스럽다.




곧 11시가 되어 전시회를 둘러볼 수 있었다.

입장권은 4,500원이었다.

이번 2021.01.22부터 2021.02.17까지였는데 운 좋게도 연장 전시를 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김택화(194002006) 작가는 제주 태생 화가로 40년 동안 제주의 풍광을 화폭에 담아냈다.

또한 1990년대 도내 언론사에 연재했던 4.3항쟁 소설 '한라산' 삽화 작업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중에 대중에 가장 친숙한 작품은 한라산 소주 패키지 그림 원화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제주 풍경(드로잉) 50점과 자화상(유화) 1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 쪽 생의 마지막 6점의 스케치가 인상적이다.

작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미술관 한켠에 놓인 도슨트에 따르면 40년에 걸친 화가 인생 초기에는 추상적 표현이 강했으나 60년대 말에서 에서 8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점차 제주의 풍광을 그대로 구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90년대 초중반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 제주는 거의 전 지역에 걸쳐 해안도로가 개설되고, 아파트와 대규모 상권, 테마파크 등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김화백은 얼마 남지 않은 제주다움을 좌우로 길게 뻗은 파노라마 프레임에 담았다.

2000년대 이르러 '이제 더 이상 보고 그릴 것이 없다. 기억에 의존하자니 내 기억의 프레임은 정사각에 가깝다.'라며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제주의 이미지를 정사각 프레임에 담았다.

전시를 모두 본 뒤 굿즈샵과 카페를 마저 둘러보고 전시관을 나왔다.

버스를 잘못 내려 우연히 오게 된 곳에서 좋은 공간과 작품을 볼 수 있어 기뻤다.

뚜벅이는 길을 잃어도 여행이 된다.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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