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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29. 2020

Daddy look at that, m.m.m~~~

결코 잊을 수 없는 이혼 당일날의 비와 빅맥의 위로


 Daddy look at that, Daddy look at that, m.m.m~~~ (아빠 저것 좀 봐, 아빠 저것 좀 봐, m이야, m이야, m이라구)

 아이가 유치원에 갓 입학하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아마 2005년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햇살이 찰랑댈 정도로 맑은 런던의 가을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런던 남쪽의 크로이든이라는 도시에 있는 IKEA에 가던 길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다 이내 지루해졌는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벌써 졸린 눈치다. 그래도 자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재미있어 아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카시트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던 3살 아이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순간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 환희에 찬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엄마를 닮은 작고 앙증맞은 보조개도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가 소리쳤다. 맥도널드 간판인 m을 보고 말이다. 아이의 얼굴에서는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경이로움이 넘쳐났다. 아토피가 심했던 아이에게 콜라와 햄버거는 금기 식품이었지만 아이는 그 금단의 영역을 가뿐히 넘어서고 말았던 모양이다. 유치원 입학과 동시에 아이는 친구들 생일파티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의 좁디좁았던 세상에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유치원 입학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런던의 유아 사교계에 입문한 것이다. 친구들 생일 파티를 피자헛이나 맥도널드 등에서 하게 되면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정크푸드의 매력에 일지감치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탄산의 알싸한 맛과 설탕의 달달한 맛은 천국의 맛이었을 것이다. 햄버거에 투입되는 화학조미료는 또 어떤가. 단숨에 아이를 매료시키고 말았음에 틀림이 없다. 밋밋하고 맛없는 유기농 음식만 먹다가 그야말로 맛의 혁명에 빠져든 것이다.

 이민 초기, 살인적인 영국의 물가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지금이야 한국과 많이 비슷해졌지만 20년 전만 해도 차이가 컸다. 엄마 아빠는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유기농의 높은 벽은 아이만은 어떻게라도 지켜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엄마 아빠의 다짐은 정크 푸드의 세계 앞에 무너져 내렸다. 아이가 맥도널드 햄버거와 칩스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아이들의 사교계에 피해 갈 수 없는 불문율이 있었다. 아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햄버거와 콜라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와 아빠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 물결치기 시작했다. m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가 콜라 대신 맥주를 마시는 나이가 되었다. 버거와 칩스는 이제 아이의 맥주 안주로 신분이 추락하고 말았다.   



 서울 가정법원에서 이혼하고 나오자마자 왜 빅맥세트가 급 땡겼던 것일까! 나와 아이가 가장 혐오하는 정크푸드의 대명사 중 하나인 빅맥에는 잊어서는 안 되는 어떤 소중한 추억이나 향수가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그날, 그러니까 아내로부터 이혼당하던 날에 런던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도 비가 많이 내렸다. 오전 11시쯤이었을 것이다. 서울 가정법원을 나서는데 맥도널드의 m자 로고가 보였다. 유치원생이던 아이가 처음으로 m이란 단어의 알파벳을 큰소리로 말하던 그 m이었다. 색깔도 노란색 그대로였다. m이란 알파벳을 보자 빅맥 세트가 먹고 싶어 졌다. 배가 고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오전에 브런치로 빅맥세트를 먹었다. 그게 올해 들어 내가 먹은 마지막 고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오후에 무릎 수술과 다발성 말초신경병이라는 희귀 난치성 질환을 위해 입원해야 했다. 수술도 수술이었지만 내친김에 각종 암 검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원하는 그 날 저녁부터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내로부터 이혼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협의 이혼이었기에 이혼 절차는 짧고 간단했다. 하지만 그 중압감만은 그리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근엄하신 판사님의 서명이 들어간 종이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부부에서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국가가 보증해주는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노비나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문서처럼 느껴졌지만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아내가 중심이 된 가족에서 퇴출당한 느낌이었다. 버림받은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누군가를 버리고 누군가는 누구로부터 버림받고 하는 감정들이 중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만 노조도 없이 아내에게 대항하다 남편이란 직무에서 짤린 것이 비통했을 뿐이다. 국가의 도움까지 얻어가면 아내는 그토록 바라던 혼자 살 자유를 찾았지만 나는 그토록 바라지 않던 혼자 살 의무를 떠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 부족이나 국가 시스템이 개인의 이혼에까지 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섬뜩한 감정에 압도당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혼 서류를 한 참 동안이나 읽고 또 읽어보았다. 이깟 종이가 뭐라고 그 많은 사람들은 이 서류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나와 아내의 협의이혼 서류를 백팩에 넣지 못하고 가정법원 청사를 나섰다. 갑자기 백팩이 무겁게 느껴져서 가방에서 다시 뺀 것이다. 아들이 사용하다 버린 노트북이 무겁다고는 생각했지만 종이 한 장 더 들어갔다고 그렇게 무거워질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다시 빼들었다. 대신 백팩의 공간이란 공간에는 조만간 닥칠 혼수상태의 미래가 들어가서 압축되고 있었다. 그 무게 때문이었을까. 지표면에서는 여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일종의 불안증세였다.


 아내와의 이혼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나의 정신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매주 정신과에서 상담치료를 받았지만 치료라기보다는 일종의 고백이었고 고해성사였다. 의사 선생님은 듣고 기록할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은 누가 의사이고 환자인지 헷갈리기도 하였다. 효율적인 처방을 위해서라면 나의 마음을 까발려서라도 최대한 보여주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말을 창조해내는 편이 쉽다는 생각을 종종 하였으니깐.

 문제는 정리였다. 마음속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퍼즐들을 꺼내기는 하는데 정리가 되지 않았다. 두서가 없었던 것이다. 말하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중력이 없었더라면 분열되려는 마음의 파편 조각들은 이미 우주로 달아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우울했다. 내게 우울이란 이미 종량제 봉투에 버려서 쓰레기로 전락한 감정들을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 때로는 하릴없이 카페에 앉아 혼자서 꺼내보기도 하고, 때로는 강가에 앉아 흔들리는 강물의 표면을 바라보며 꺼내 보기도 했다. 심지어 의사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 꺼내볼 때에도 그 감정은 항상 한 몸처럼 일사불란했다.



 우산 대신 왼손으로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이혼 서류봉투는 내 옆구리로 옮겨졌다. 너무 젖으면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비를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죄 없는 서류까지 망가지게 하고 쉽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순간 폭우가 쏟아져 그 서류들이 비에 흠뻑 젖어 종이의 원료인 펄프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담담한 척했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국가 권력의 근엄함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혼 서류들을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비에 저항해서 펄프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이혼 서류는 말이 없었고 잘못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아내일까. 나일까. 아님 둘 다일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부부 사이에도 끝내 타협이 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 문제들은 차차 다루어볼 예정이다. 비록 고지식하고 멋대가리 없는 남자이긴 하지만 단순한 남자가 아닌 소외받고 억압받는 그래서 약자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남편의 입장에서 말이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많이 내렸다. 겨울비여서 더욱 심란하고 냉기를 머금어서 싸늘하기까지 했다. 아침에 지하철 의자 앞에 두고 내린 우산이 생각났다. 지하철 분실물 센터로 가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운명의 우산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우산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운명을 생각하며 걸었다. 맥도널드와 맥도널드 햄버거가 그려진 배달용 오토바이의 배달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이 시점에서 허기가 느껴졌을까. 그것도 나와 아들이 그토록 좋아했다가 그토록 싫어했던 애증이 교차했던 정크 푸드의 대명사 빅맥 세트가 먹고 싶어 졌다. 비도 피할 겸 햄버거로 브런치를 먹으려고 안으로 들어섰다. 장렬한 피날레 같은 이혼 기념 브런치였다. 차가운 콜라 대신 따듯한 커피의 향과 온기가 좋았다. 번거롭게 반찬을 집어먹을 필요도 없어 좋았다. 빅맥에 대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세 살의 반짝이던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위로가 이런 것이었구나. 누군가를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상큼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맥도널드 매장을 나섰다.


 내 우산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잃어버렸다. 우산 쓴 사람들은 겨울비속에서도 바삐 일상을 향해 오고 갔다. 지하철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혼 판결을 기다리는 부부들 못지않게 무표정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다. 서초구청의 민원실 가족관계부서에 이혼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생각이 멈춰버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왜 뜬금없이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일까. 우산도 없이 말이다.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일단 구청에서 나와 양재역 지하철 출구를 향해 걸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지하철 출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양재역으로 향하면서 다시 비를 맞았다. 아침에 드라이를 하고 볼륨을 살려 초강력 스프레이로 세팅을 한 머리카락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렇지 않아도 직모인 나의 머리카락들은 최후의 보루인 참호를 뛰쳐나와 각개전투에 나서는 소총병들 같았다. 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들의 소총 끝에는 대검이 장착되어 있어 그나마 두려움을 줄여주고 있었다.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니 기다란 승강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의 목적지가 생각났다. 공유 오피스도 오피스텔도 아닌 분당의 모 병원이었였다. 선배가 원장으로 있는 바로 그 병원이었다. 그랬다. 나는 그날 오후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다음날이 수술이었다. 오전 내내 궁금했던 기내용 캐리어의 용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지하철역의 승강장 양쪽에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나의 머리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은 다 젖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흔한 3단 접이식 싸구려 우산 하나 없이 저 남자는 대체 어디를 저렇게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일까.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든 빨리 기차가 와서 이 사람들을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맞은편인 아닌 나의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비로소 이혼 전문 변호사들의 광고사진이 덕지덕지까진 아니었지만 제법 많이 붙어있던 끔찍한 양재역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말 끔찍했던 오전이었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에서 나오는 따뜻한 히터의 열기에 빠져 잠이 들어버렸다. 꿈까지 꾸었다. 문제는 그 꿈속에서 잃어버린 우산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큰 소리로...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 그댄 내게 단 하나 우산이 되었지만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이젠 지나버린 이야기들이 내겐 꿈결 같지만 ~~( )~~  잊혀져간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게 우산이 되리라.~~~~)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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