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남자 Oct 24. 2020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별거생활

여보, 숨을 쉴 수가 없어. 숨을 쉴 수가 없다구.

 

 나의 삶을 초토화시켰던 아프고 시린 단어하나 있다. 바로 " 별거"라는 단어다. 


 아내와의 별거는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풀지 못한 난제들은 빛 한점 들어올 수 없는, 그래서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암울한 지하 창고에 켜켜이 쌓여갔다. 동시에 세상은 우울과 혼돈의 광기 속에 젖어들었고 자주 유혹에 빠져들었다. 아내에게 가장 멋지게 복수해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삶의 끈을 놓고 싶은 유혹은 달콤하다 못해 짜릿해 보였다. 끊임없이 죽음 이후의 시나리오들을 그려보았다. 비록 내가 우주에서 소멸되긴 하지만 그래도 멋져 보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은 점점 사막처럼 황폐해졌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녀의 소설인 댈러웨이 부인이나 등대로 등의 문장들에서 자주  언급했던 자살이란  단어 앞에 나도 자주 흔들렸다. 몸도 마음도 내가 아닌 듯한 방관자적인 야릇한 삶에 시달렸다. 위기였다.



 어제도 한라산 자락과 협재 해수욕장에는 바람이 참 많이 불었다. 내 마음에도 바람이 거세게 불어댔다. 제주가 비록 바람의 섬이라고는 하지만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제법 인파가 붐볐지만 여전히 외로운 감정 앞에 무기력했고 쓸쓸한 가슴에는 바람이 통과했다. 구멍 난 나의 가슴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우울모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자주 바람에 흔들리긴 했지만 그나마 맛깔스러운 가을 햇볕이라도 쨍하고 나 주었기에 견딜 만했다.

 이번 여행 동안 커플이나 가족들이 같이 여행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많이도 생각하고 참 많이도 느꼈다. 아! 저들에게는 저 순간이 행복일 텐데 저들은 정말 저 순간을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나에게도 저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시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땐 정말 최선을 다해서 매 순간을 사랑해줄 수 있을 텐데. 떠나보내고 모든 것을 잃어봐야 일상의 소중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었는지를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나란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삶을 소진시켜왔을 뿐이라는 자책과 함께. 자책하지 말아야지를 입에 달고 살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살다 보면 부부가 떨어져 살아야 할 때도 있다.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별거생활은 3년이나 이어졌고 끝내 우리의 모든 것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부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을 역기러기 아빠로 살아야 했다. 역기러기 아빠란 기러기 아빠의 반대말로 해외에서 아내와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 아이의 교육을 시키는 아빠를 의미한다. 물론 내가 급조해낸 단어이기다.


 런던의 어느 화창한 봄날! 무섭도록 섬찟한 시련이 우리 집의 처마 밑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연예인 병이라고도 불리던 공황장애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내의 공황장애로 인해 시작된 어쩔 수 없는 별거는 모든 것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불행들은 잔인할 정도로 집요하고 줄기차게 들이닥쳤다. 집체만 한 파도가 항구의 부두를 끊임없이 공략하듯이. 

                                  


 며칠 전 아내와 주고받았던 카톡 메시지 몇 개의 위력은 메가톤급 이상이었나 보다. 이혼한 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충격의 파동들은 나의 온몸에 뻗어있는 모세혈관과 자율신경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도망치듯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떠나왔다. 덕분에 나는 지금 제주도에 와 있다. 예정에 전혀 없던 여행이 시작되었고 벌써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지금은 협재해수욕장을 바라보며 별다방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상처 받았지만 위로받지 못한 나의 불쌍한 영혼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이젠 나에게 자주 선물을 주어 나 자신을 토닥거리며 살기로 했다. 홀로서기의 기본은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부터 일 테니까. 내가 행복해지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아가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결혼생활 동안 아내를 진솔하게 다독여주고 소통하며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자책은 크고 무거웠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들이었다. 아버지도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내가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아픔이고 비극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끊임없이 충돌했고 나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그리고 내가 입 밖으로 흘려보냈던 단어들에는 비열함이 숨어있었다. 배우자의 원망과 고통에 그 흔한 공감 하나 건네지 못했던 비겁한 자들의 변명 나부랭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나도 사람 좋다는 소리를 평생 들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 한 사람도 사랑해주지 못한, 끝내는 그녀들의 삶을 망가트리고 말았던 못난 위인이었다. 나는 한 때는 아버지를 존경하기도 했었지만 오랫동안 경멸했던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많은 스트레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어머니는 쓰러지셨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자식이 부모를 용서하고 안 하고 따위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내가 가지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그다음 해에 아내가 쓰러졌다. 어머니에게도 아내에게도 죄스러울 뿐이다. 물론 두 사람이 쓰러진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찌 되었든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어쩌면 나는 삶의 마지막 들숨을 폐에서 입과 코 밖으로 내보내고 심장과 뇌가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죄책감과 자책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더 큰 두려움은 나 자신이 거대한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삶을 소진한 채 끝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지 말아야지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곤 다. 어둠이 찾아오듯 서슬 퍼런 우울이 광기를 머금고 찾아들면 상충된 내면의 자아들이 불꽃을 튕기듯 으르렁댄다. 그때부터 나에게 시간이란 금방이라도 멈춰서 버릴 것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어내야만 하는, 일부는 손안에 움켜쥐고 나머지는 주머니에 넣은 뜨겁게 달군 돌멩이가 되고 만다. 뜨거운 돌멩이들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어서 저 강물로 뛰어내리라고. 머뭇거리는 시간들은 달아오른 생각을 불투명하게 왜곡시키고 미화시키려 든다. 또한 그 순간 존재하려 드는 시간 앞에 부유하는 공간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흐르는 강물 위에서 방황할 뿐이었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우울증을 견디지 못한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59세 되던 따뜻한 봄날 우즈 강의 다리를 지나 강둑에서 뛰어내리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남편과 언니에게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서 우즈 강가의 둑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며 입고 있던 자신의 모피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집어넣고 있었을 그녀의 심정을. 심각해지는 자신의 정신질환을 고민하며 남편에게 써 내려간 삶의 마지막 편지에서도 그녀의 식을 줄 모르는 야릇한 광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께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내게 완전한 행복을 주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당신보다 더 잘해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믿어주시겠죠. 하지만 나는 이걸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나는 당신의 삶을 소모시키고 있어요. 이 광기가 말이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병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했다는 거예요. 모두 당신 덕이예요. 아무도 당신만큼 잘해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맨 처음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에요.



 우리 부부도 아내의 공황장애라는 불행과 맞닥뜨리기 전 까진 큰 무리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행복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아내의 치료를 위해 별거라는 극단적인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옵션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조만간 좀 더 건강하고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리라는 부푼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해였음을 차차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우울을 시작되었다. 3년 후, 영국을 떠났던 아내와 아이가 런던으로 돌아올 무렵 나는 이미 우울이라는 강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한국으로 들어가서 치료와 휴양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쫓기다시피 한국에 들어온지도 벌써 2년이란 시간들이 흘렀다. 20년 같았던 2년이었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통해서 이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다음 달이면 잠시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삶의 터전인 런던으로 돌아간다. 코로나가 창궐 중인 무서운 도시로 말이다.


 요즘은 실없는 사람처럼 산속에 들어가면 아름드리 편백나무를 껴안고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너 참 오랫동안 모진 세월을 잘 견뎌주었구나. 나도 너처럼 그러고 싶은데 잘 안되거든. 나 좀 도와줄래?" 라거나. 커다란 바위에 앉아서 바위를 쓰담쓰담 토닥거리며 말을 걸기도 한다. "넌 언제부터 여기에 자리 잡고 있는 거야. 외롭고 힘들지 않아. 나 같으면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라든가. 하얀 물보라를 해변으로 밀어대는 해변에 서 있으면 파도에 말을 걸기도 한다. "파도야, 넌 언제부터 이 바다에 살고 있었니. 매일 쉬지도 못하고 해변으로 바닷물을 옮기느라 고생이 많지. 너도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거니? 파도 너는 다른 파도들에게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아서 좋겠다. 난 언제쯤이나 너처럼 초연해질 수 있을까?" 라며 말을 건다. 나무나 바위나 파도에 말을 걸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 자신에겐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자주 말 못 하는 자연들과 친해지려 노력한다.  
                        


 그러니까 7년 전 어느 날이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친구 제임스가 쓰러져 가슴을 부여잡고 죽어갔다. 지난해에 브런치에 친구 제임스가 죽었다.( https://brunch.co.kr/@@79TC/190)라는 글을 올렸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제임스가 갑자기 쓰러져 허망하게 죽어간지 1년도 채 안되어서 아내가 쓰러졌다. 순간 나는 페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겁이 났다기보다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발 이 순간만 잘 넘겨주기를 하늘에 계신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무신론자의 기도 치고는 제법 구체적이었고 간절했다. 다행히도 구급차가 몇 분 만에 달려왔고 아내는 병원 응급실에 곧바로 이송될 수 있었다. 아내는 그날 오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무사했다는 안도감도 잠시였다. 아내는 계속해서 자주 쓰러졌고 그때마다 구급차가 달려왔지만 의료진이 해 줄 수 있는 별다른 치료는 없었다. 아내의 병명은 공황장애라고 했다. 공황장애가 이처럼 무서운 병인 줄은 지켜보거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호흡곤란을 초래하는 아내의 발작은 30여분 정도 이어졌으며 그때마다 과호흡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단은 아내를 한국으로 보내서 치료와 휴양을 받으며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곧 중학생이 되는 아이도 같이 보냈다.


 그 무렵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이민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기도 했다. 영주권도 해결하고 경제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그러다 보니 다툴 일도 없어졌다. 속된 말로 살만한 세상이 도래했다. 경제문제가 순조롭게 풀리면서 아내는 돈 문제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날이 이어졌다. 돌이켜보니 부부싸움의 가장 큰 요인은 결국 돈 문제로 귀착되었다. 오랫동안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생활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활을 견뎌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여유로워졌다. 이젠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렇게 문턱이 높던 바클레이와 HSBC 은행이 태도를 바꾸었다. 대출을 위해 드나들 때는 만리장성처럼  높게 느껴졌던 은행에서는 역으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시도 때도  없이 말이다.      


 러니까 6년 전쯤 어느 날 봄날 아침이었다. 그날은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기도 하다. 여느 날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란 수선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면서 우중충하던 런던의 날씨도 화창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웃집 담벼락엔 이미 개나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이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2층 침실에 있었다. 주방에서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던 아내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불렀다. 갑자기 호흡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몇 분 만에 아내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고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얼굴로 변해갔다. 얼굴이 마치 초승달처럼 하얐다고나 할까. 나는 공황장애라는 병을 몰랐기 때문에 순간적인 빈혈 정도로 생각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거실 소파에 앉힌 다음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아내는 계속 숨쉬기가 곤란하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불길한 직감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단순 빈혈 정도가 아니라 뭔가 심각한 질병일 거라고. 영국에 이민 온 지 14년 만에 999를 눌렀다. 손이 떨려서 쉽게 터치가 되지 않았다. 곧바로 통화 연결이 되었고 나는 아내의 상황을 설명했다. 상대방 여자는 전화를 끊지 말고 계속 상활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아내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집 앞 도로에서는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자마자 구급대원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로 들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일상의 시간은 아침 7시 반을 막 지나고 있었다.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이전 03화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