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가 49세에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결혼한 부부라면, 지금이야 각방을 쓰건, 별거를 하건 심지어 이혼을 고려중이거나 이미 해버린 커플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했던 하루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하루가 주는 의미는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이나 대단했다. 그 하루를 위해 숱한 연애사를 썼다. 실연의 아픔을 "실패"라는 감정으로 부여잡으며 독한 깡 소주도 마셔보았다.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전략과 전술을 바꿔 보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리 쉽사리 나의 반쪽을 내어주지 않았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나이는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결혼 따위는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시 비혼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정말 인생의 패배자처럼 보일 것 같았다. 실제로 선배 중에 혼자 사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배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국 결혼을 선택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하고 싶은데 연애가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는 비혼 주의자다."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단지 주변 지인들과 가족 친지들의 무관심한 듯한 관심들, 특히 어머니의 안달과 닦달은 "결혼이라는 것은 누구나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머릿속에 심어주었다. 머리에 못을 대고 망치를 내려치듯이 말이다. 그렇게 못은 깊이 박혀갔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화려하고 찬란한 그날 그 순간에 별거나 이혼 따위를 생각하거나 고민했던 신랑이나 신부는 아직까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날 그런 상상을 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신감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이 결혼식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염두에 두며 결혼식을 하는 일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 날 이혼이란 단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단어였다. 모든 것은 화려했고 하객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 나아가서 우주가 우리를 위해 축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단한 하루였다. 긴장해서 간헐적으로 피로가 물려들긴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정은 구름 속을 걷고 있었다. 마약을 어느 정도 해야 그런 환상에 빠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몰론 나는 마약과는 친구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결혼식 당일 날 기분이 아마 그런 기분이 아닐까!라고 감히 유추해볼 뿐이다.
20년 전 나는 모진 연애사의 굴곡과 부침을 이겨내고 그 화려한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인간 승리였다. 30대 중반이었으니까 거의 15년의 실패들이 모여 그 하루를 빚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아내셨다. 감정 표현이란 모르고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 또한" 장하다!"라는 멘트를 서너 번이나 날리셨다.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이제 행복하게 잘 살일 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나의 극적이었던 결혼식은 서울 방배동의 어느 예식장에서 열렸다. 다들 그렇겠지만 그날 결혼식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모든 상황들이 과장되어 있었고 행복이란 감정 또한 당연하고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들뜬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마치 가장무도회나 연극무대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대사도 없는 무언극의 주인공이 되어 이렇게까지 조명을 받아도 되는지 의문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 커플을 위해 이 거추장한 이벤트가 열려도 괜찮은지 한 번쯤 반문해야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이 들지 않았음은 확실했다. 따라서 그 당시 나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었음이 틀림없다.
나도 아내도 부모님도 분장에 가까운 화장에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할 정도였다. 그날 많은 하객들이 왔지만 누가 왔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 얼굴이 다 그 얼굴로 보였다. 그런데도 유독 기억나는 장면이 있었다. 친구들이 나와 아내를 위해 연주를 하고 축가를 부르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 축가를 불러주던 친구 커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 인생의 선배였다. 나는 당시 먼저 결혼한 또래의 친구나 지인들을 인생의 선배로 인정했다. 그런데 그 인생 선배였던 친구들의 커플은 이제 대부분이 이혼을 했거나 별거에 가까운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 당시 멋진 화음과 멜로디는 천상의 화음이었다. 그들도 나도 아내도 하객들도 들뜨기에 충분했다. 6월이었기에 봄이 지났지만 다시 화려하고 들뜬 4월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랬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마침내 내 인생에도 봄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땐 몰랐는데 그날 나의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흘린 두 명의 아가씨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아내도 알고 있었다. 나만 몰랐던 것이다.
20년 전 봄은 화려하다 못해 찬란했다. 드디어 내 인생에도 봄이 찾아온 것이다. 30대 중반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되는 연애의 실패는 나를 지치게 했다. 부모님의 성화도 성화였지만 여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어느 정도는 결혼을 포기한 상태였다. 어차피 연애는 영업이고 결혼은 계약이었지만 결혼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실패의 확률은 커져만 갔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지고 거래를 시도하려는 것이 당연했지만 눈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같아 불쾌했다.
솔직히 당시만 해도 나의 조건 정도면 굳이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을 것도 같았는데 상대방 여성들은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야만 직성이 풀렸나 보다. 돌이켜보니 내가 상대방 여성이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젊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던 나는 여전히 오만했고 쥐뿔도 없으면서 자신감만 충만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좀 더 좋은 조건에다 재력까지 갖춘 남자를 찾는 것은 여성의 본능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도 그렇게 시작한다. "재산깨나 있는 남자가 독신일 경우에 아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다. 이러한 남자가 이웃에 이사 오면 그의 성격이 어떻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앞서 말한 진리가 주위 사람들의 마음 한가운데에 꽉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응당 수많은 딸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듯 재력을 계산하려 드는 행위를 비난하는 것 또한 편견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조건 따위를 깡그리 무시하고 사랑 하나만 믿고 나를 선택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런 아가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이민까지 떠날 수 있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의 앞날엔 마치 핑크핏 장미들만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결혼 당시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사랑 하나면 모든 것은 만사형통일 줄 알았다. 사랑의 위대함을 맹신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진 않는다. 그 또한 내가 걸었던 소중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무슨 마음으로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결혼이란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모든 이성적 판단을 무력화시켰다. 살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이 아득하고 영혼에는 자주 지진이 나고 태풍이 몰아쳤다. 사랑하나면 모든 것은 만사형통일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잘 살 것만 같았다. 행복은 이미 쟁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위기가 찾아와도 행복이란 녀석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잘 가두어 두면 될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유지 보수를 하고 관리해 나갈 것인가는 계획이 없었다.
낯선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 결혼이다. 따라서 결혼할 때는 가장 현명하고 냉정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인생에서 가장 식견이 높아야 하는 순간이 결혼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식견이 가장 높아질 때는 결혼이 아니라 이혼을 결정할 때였다. 어차피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도 탓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젠 잘할 자신이 있다. 공부만 예습과 복습이 필요한 줄 알았다. 하지만 연애도 결혼생활도 공부 못지않게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만 깨달았다. 진심 하나만으로, 사랑 하나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기에는 매개변수가 너무 많았다. 사랑이라는 종속변수는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의 찰스 다윈은 "지식보다는 무지가 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라고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놀라운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오직 감성에만 충실하도록 세뇌를 시켰다. 나의 아내가 될 아가씨는 아름답고 이성적이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현명했다. 무엇보다도 세속적이지 않았다. 비록 손으로 꼽을 정도로 몇 번 만나지 못했지만 아내는 데이트할 때마다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고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더욱 빨려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을 떠나서 살 수 있는 가치관이 확고했다. 결혼식만 마치면 나의 숙원 과제였던 이민도 같이 떠날 수 있는 아가씨였다. 너무 멋지고 대단했다. 결혼을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나는 안정된 공기업에서 제법 잘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삶의 판도를 바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2세만큼은 다른 환경에서 사람다운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 아내 또한 고부갈등의 프레임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사랑 앞에서 삶의 구체적인 계획 따위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아내는 충분히 현명했고 남편은 충분히 패기와 결단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 다 젊었다. 실제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세우려 해도 가진 것도 경험도 없어서 무의미해 보였다. 그랬다. 살다 보니 문제는 정말 엉뚱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아내의 현명함에 나의 결단력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나는 무시무시한 독선에 빠져들었다. 깊고 넓은 늪이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내의 충고를 자주 무시했고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초래하며 부부 사이의 불신은 커져갔다. 아내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냉랭하게 차가워졌다. 마치 늦은 가을날 아침의 서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얼 정도로 쌀쌀해져 가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대화는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중요한 진솔함 따위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자주 혼자서 중얼거렸다. "우린 어쩌다 결혼했을까?"
그래서였을까!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 여정의 99%가 비극의 연속이다."(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