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난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 거 같아. 숨이 막힌다구.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그냥 나 혼자 살고 싶다고! 비구니도 좋고 수녀도 좋아. 그냥 혼자 살게만 해줘!"
정적이 흘렀다. 순간 온 세상이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또렷하게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 가위눌릴 때 들었던 말들 같기도 했다. 아니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한 말 같기도 했다. 너무 어렸을 때여서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어머니는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도 여러 번. 귓전에서 맴도는 아내의 말들은 데자뷔 현상처럼 나의 뇌세포들을 자극하며 기억들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실제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내 앞에서 시계도 움찔 해저서 아주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1분이 10분처럼 아니 1시간처럼 슬로 모션으로 흘렀다. 째깍거리는 초침은 더 이상 째깍째깍 소리를 내지 못하고 늘어졌다. 아날로그 시절 워크맨이나 마이마이에서 돌아가던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면 나는 괴상한 음악 소리처럼 늘어졌다. 거의 5분 동안이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면서도 아내를 응시해 보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아른거리는 아내의 형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아내는 허상처럼 변해버린 나를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서는 천년쯤은 사무친 원한이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레이저 광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뒷목을 부여잡지 않을 수 없었다. 뇌로 들어가야 할 피들이 뒷목에서 막혀 오도 가도 못하며 나를 압박해왔다. 동시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진부한 슬픔들이 몰려들었다. 그 슬픔에는 단지 익숙해져 버린 아픔의 기억만이 잠겨 있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고 아팠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묵직한 펀치를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아내에게서 말이다. 아내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한 대본을 말하듯 속사포처럼 사무친 감정들을 단어로 조합하여 입 밖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아내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손끝은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아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강철 같았던 어머니는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뒷목을 잡고 쓰러진 어마니는 결국 뇌졸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7년 전의 일이었다.
2년 전 여름날 저녁이었다. 런던 하늘은 나의 출렁이는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제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구름들이 태양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처럼 진한 붉은색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이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석양이 가장 붉고 화려했다. 낮이 유난히도 긴 런던의 여름은 축복받은 계절이다. 비도 오지 않고 날씨도 덥지 않다. 석양은 특히 아름답다. 그날따라 런던의 석양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금방 내 앞에서 시한폭탄이 터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면서 말이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거실에는 TV가 켜져 있었고 카펫 위에는 고양이님이 졸고 있었다. 순간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불길하게 느껴졌다. 2층에 있던 아내가 내려오는 소리였다. 아이가 뛰어내려오는 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아이는 자주 계단에서 뛰어내려오거나 올라갔지만 아내가 계단에서 뛰다시피 내려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부엌에 들러 와인과 함께 마침내 시한폭탄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아내가 마치 어두워지길 기다린 것처럼 창밖으로는 저녁노을이 사그라들며 마지막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정원은 삽시간에 어둠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와인병과 와인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아내는 거실 커튼을 쳤다. 아내가 움직이는 동선에서 냉기가 가득한 찬바람이 휙휙 나오고 있었다. 어둠은 오싹한 냉기와 함께 커튼 뒤에 가려졌다. 순간 거대한 긴장감이 일었다. 나의 말초신경들이 자고 있던 세포들을 깨우는 사이 아내는 나를 마주 보고 탁자 앞에 앉았다. 아내는 무표정하게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딴 다음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와인잔에 삼분의 일 정도 와인이 따라졌다. 아내는 말없이 와인잔을 들었고 나도 아내를 따라 했다. 짠 하고 와인잔이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의 정적을 깨기 위해서 소리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짠하고 나는 소리는 둔탁했다.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거실을 맴돌며 서성거렸다. 영혼 없는 소리였다.
우리는 와인을 조금 마신 다음 탁자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말문을 먼저 연 사람은 나였지만 아내는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포문을 얼어재꼈다. 나는 그날 아내와 날이 선 난상토론을 해야만 했다. 심야토론이었다. 일방적으로 깨지면서도 가까스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토론은 끝났지만 도출된 결론은 없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었다. 우린 다음날 싸움 같은 토론을 이어갔고 마침내 결론을 이끌어 냈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이렇게까지 치열하고 처절하게 대화를 나눠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결론은 이혼이었다.
토론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놀랍게도 나의 여자들과 외도였다. 아내의 외도 기준은 남녀 간의 섹스만이 아니었다. 남녀가 섹스를 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거나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도 외도로 규정한다고 했다. 나의 결혼식 때 뒤에서 눈물을 흘리던 아가씨 두 명의 이름부터 그동안 알고 지내던 여사친들의 이름이 줄줄이 사탕처럼 끌려 나왔다. 그리고 난타를 당했다. 나는 아내에게 외도를 증명하라 맞섰고 아내는 외도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놀라울 정도로 설명하고 있었다.
병적으로 보였다. 내가 어떤 설명을 해도 구구절절 변명이 되고 있었다. 분하고 억울했다. 제대로 바람이라도 한번 피워보고 이렇게까지 당했더라면 억울한 마음이 들진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내의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판결을 내려줄 판사도 없었지만 변론을 맡아줄 변호사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기소부터 판결까지 일사천리로 몰고 나갔다.
무서웠다. 꽤 오랜 별거 시간들이 무색해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내를 탓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의심할 짓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결국 나는 아내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래 봐야 누워서 침 뱉기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맞짱을 뜨며 반격을 시작하였다. 어차피 누가 이기든 이미 갈길은 정해져 있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웠던 결혼이 무너지는데는 실로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지만 삽시간이기도 했다. 허무해서 눈물이 나왔다.(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