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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05. 2020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프롤로그> 이혼! 남편들도 할 말이 아주 많다구요.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2017년 여름, 일본의 고바야시 미키는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책을 이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의 가정 내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어서 충격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살의를 느끼는 과정과 실제 사례들이 케이스별로 요약정리되어있다. 그러면서 남편이 살아갈 길도 제시하지만 일본 노동 환경의 한계 때문에 이 또한 쉽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가정들은 어떨까? 대체로 건강한 편일까? 한국의 남편들은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님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을까?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부부관계가 좋아서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거나 병에 걸린 남편이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거나, 또는 실제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 상심한 아내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일까?(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고바야시 미키 저. 서문 중에서)"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마침 나는 아내로부터 남편이라는 직책에서 해고를 당했기에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자칫 찌질하고 한심한 반성문이 될 수도 있지만 남편의 세계에도 척박하고 힘겨운 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대변하고픈 쓸데없는 욕심이 일렁였다. 그래서 남편의 시각에서 남편들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남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도 못 하고 당하고만 사는지, 그럴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내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정말 남편들은 뇌가 없는 단세포 동물인지, 종족보존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남자들의 수컷 본능 DNA가 이성만으로 통제 가능한지를 나와 몇 사람의 지인의 사례를 통해 들쳐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이혼 이야기를 빠트리고는 시작자체가 불가능했다. 없던 용기를 친구에게 빌려서라도, 아니면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아서라도 외쳐보고 싶었다. "아내(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서울 가정법원 가는 길에는 아침부터 겨울비가 사납게 내렸다.


 이혼 당일 이야기는 여러 번 반복될지도 모른다. 받은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올해 1월 첫번 째 화요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바람이 사납게 불고 귀가 빨갛게 변색할 정도로 추웠다. 아침부터 온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눈발도 가끔 섞여서 내렸지만 도로에 닿는 순간 액체로 흐느적거려야 하는 험상궂은 날씨였다. 김포의 오피스텔에서 두 번 환승해서 양재역의 서울 가정법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집을 나설 때 우산을 챙겼고 마음 또한 단단하게 챙겼다. 생각들은 자주 흔들렸고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이젠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절망감에는 희한한 희열이 섞여있었다. 희열이 거기에 끼어들 자리가 아닌데도 깜빡이도 켜지 않고 불쑥 끼어들었다.

 출근길은 한 겨울날 비 오는 아침이라고 한가하지 않았다. 배드 타운이 된 한강 신도시 사람들을 나르느라고 작고 좁은 김포 골드라인은 미어터지고 있었다. 푸시맨 할아버지의 손아귀 힘을 등에서 느끼며 겨우 아담한 지하철에 탔다. 서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모두 마네킹처럼 행동했다. 그래도 출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가는 표정 없는 무수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일은 작은 위안을 주었다. 잠시 마네킹이 되어야 하는 불편함도 행복처럼 보였다. 그들과의 이상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나도 직장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앉아있었다. 9호선의 종점인 김포공항에서 환승하기 때문에 앉을 수 있다. 물론 자리에 앉으려면 치열한 수싸움에는 눈치싸움과 몸싸움 그리고 시간싸움까지 계산해내야 한다. 보통일이 아니지만 직장인들은 자연스럽게 태연하게 해냈다. 역시 프로들 다웠다.


 자릴 잡자마자 노트10플러스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도 역마다 지하철이 정차한 후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장면이 연출되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관찰자의 신분으로 돌변하다가 이내 고개를 처박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고속터미널 역에서 잊지 않고 내려 3호선으로 환승하는 영특함을 발휘했다. 몇 정거장만에 양재역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와 서울 가정법원으로 향하는데 우산을 놓고 내렸다.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았다. 혼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합승을 요청할 기분도 아니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하긴 택시도 아닌데 승차 거부하면 괜히 쪽팔리기만 할 것이다.

 비를 흠뻑 맞고 최종 목적지인 서울 가정법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오전 10시 31분 57초에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남편에서 남자로의 낯선 변신이었다. 마치 노비나 노예문서가 불에 태워지고 자유의 몸이 된 듯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슬픔이 성난 파도처럼 덤벼들었다. 다시 청사를 나서는데 내겐 그 흔한 싸구려 비닐우산 하나 없었다. 이혼한 사실보다 지금 당장의 비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심란하고 한심하고 초라했다. 지하철의 발밑에 두고 내린 우산이 아내보다 더 미웠다. 난 어쩌자고 우산을 두고 내렸을까.


아내의 보조개를 꼭 닮은 여자 판사님의 메마른 미소가 주는 위로


 그날 나의 노비문서를 불태워주신 분은 아내와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단아하게 입으신 법복이 하필 검은색 망토처럼 보였다. 검은색 갓만 쓰면 저승사자들의 유니폼과 거의 같아 보였다. 섬찟하고 오싹했다. 반짝임이 없는 검은 제복의 여자 판사님은 나를 안경 너머로 몇 차례 쳐다보시며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요구했다. 아내가 표정 없이 무덤덤한 기분으로 나를 째려볼 때의 표정과 유사했다. 그 순간 판사님의 눈빛은 아내의 그것과 오버랩되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인자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했다. 판사님의 양쪽 볼에 보일 듯 말 듯 패인 애매한 보조개가 나의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보조개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순간 다시 섬찟하고 오싹했다. 하지만 판사님 앞에서 떨거나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단지 아내의 보조개와 닮아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백두산 천지나 한라산 백록담의 분화구에서 수억 년쯤 전에 틀림없이 마그마가 분출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건조하고 매 마른 미소였다.      


 그 미소에는 부실하고 무책임한 남편 노릇은 이제 그만두어도 좋다고 넌지시 하지만 단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날 법원 대기실에는 이혼을 기다리는 많은 커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라는 직무에서 해고 예정자들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무표정한 표정을 짓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세상의 모든 허무와 번뇌와 괴로움을 짊어진 수도자의 표정이었다. 깨달음의 직전에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영혼마저 지쳐버린 수도자의 얼굴만큼이나 표정이 없었다.

 10여분 간격으로 줄줄이 사탕이나 영광굴비처럼 판사님 앞으로 끌려들어 가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 표정인지, 마치 세상 모든 우울은 다 짊어진 역할을 밀도 있게 보여주려는 연극배우들처럼 보였다. 그들도 나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그러니까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서 해고 판결이 내려졌거나 내려질 같은 운명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모두가 커플로 출두했는데 나만 혼자 출두했다는 점뿐이다. 참고로 내국인과는 달리 재외국민의 협의 이혼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출두해도 된다.  

 그들이 보여준 표정은 수도자보다는 차라리 연극배우가 더 그럴듯한 표현이었다. 학창 시절 산울림 극단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 “의 두 남자 배우만큼이나 표정이 없었다. 신문방송학과의 “연극 영화론”이란 과목의 숙제를 위해 보았던 그 연극은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며 지어야만 했던 허탈한 표정에서 허무주의의 세계를 이미 학문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때 실존주의가 어떻고 허무가 어떻고 하며 리포트를 쓰느라 고생했던 기억은 어쩌면 다가올 더 큰 허무들에 맞서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인과관계나 상관관계없이 우연히 한 가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혼도 마찬가지였다.


 사연이야 어떻든 결국 결혼 생활의 종착역에 모여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커플들은 아이들도 어릴 것이다. 일부 커플은 이혼이 아니라 금방 만나서 불꽃같은 연애를 시작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었다. 주책없이 나도 그 축에 어떻게든 끼어보려고 그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섞여 앉았다. 하지만 난 결코 젊지 않았다. 판사님은 다시 물었다. 아이가 아직 미성년자여서 무려 3개월의 숙려기간을 주었는데 많이 생각해보았느냐고 말이다. 나는 13일 후인 1월 20일이 아이의 만 18세 생일이라서 더 이상 부양의무도 없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13일이라는 시간이 주는 위로와 당당함이 굉장히 아쉬운 것처럼 말이다. 몇 가지 질문과 확인 절차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판사님께서 후회는 없느냐고 다시 인자하게 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엔 약간의 위로까지 들어있었다. 비록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 채 허공에서 휘발되어버린 위로였지만.


서울 가정법원 협의이혼실 판사님 앞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던 나의 비굴함


 남편이라는 직업으로부터 해고당하기 1분 전이었다. 나는 이 부당한 해고가 너무나도 싫다고, 어쩔 수 없는 협의이혼일 뿐이라고, 말이 협의였지 아내로부터 일방적으로 잘린 것이라고, 그래서 정말 억울하다고 따지고 항변하였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의 생각에 불과했다. 판사님의 질문에 나의 답변은 고작 이랬다. “네”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말하는 나의 이혼 과정의 이야기들은 반쯤은 픽션이고 반쯤은 논픽션이다. 아내와 이제 성인이 된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100% 진솔하게 쓸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혼 과정에서 남편들이 느끼는 세상 즉, 직장과 가정에 대해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아내에 대해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한 남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일부는 남편으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피해 의식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남성성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에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혼. 그 단어를 포함한 서류 하나가 갖는 위력은 대단했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을 실감하며 비록 나 자신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지만 세상의 많은 남자들의 겪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그깟 용기를 내는 이유가 뭐냐고. 부끄러운 줄이나 알라고. 그딴 용기는 내서 뭐에 써먹으려 하느냐며 비아냥댈 것이다. 분노한 것도 모자라 살의를 느끼기까지 한 세상의 많은 아내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아내들만 스트레스를 느끼고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이혼 전후로 느낀 극심한 스트레스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싶었기에, 오랜 망설임 끝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을 맞을 각오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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