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오랜만에 하늘을 아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별을 헤지는 않았지만 바로 머리 위에서 선명한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영국에서 밤마다 올려다보았던 바로 그 북두칠성이었다. 아마도 내일은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려나보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쁘다고 밤하늘을 외면하면 살아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으로 돌아온지도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올려다보던 밤하늘을 한국에 돌아와서는 거의 올려다보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들만 관찰해도 다음날 날씨가 가늠될 정도로 런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나의 생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날씨에 삿대질을 하는 여동생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다.
주말과 휴일에 비가 오면 국립공원은 찾는 이가 없어 한가해진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 식당과 펜션을 운영하는 여동생은 날씨에 대해 불만이 아주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월요일부터 멀쩡하던 날씨가 목요일쯤 되면 흔들리기 시작해서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비를 내리고야 만다. 이 험한 바위산을 비를 맞고 오르는 일은 전문가가 아니고는 위험천만하다. 그래서 알아서 등반을 자재하는 것이다. 뉴스에서 날씨가 나올 때마다 여동생은 언성이 높아지며 불만을 토로한다. 코로나도 문제지만 이젠 날씨마저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그런 여동생의 모습에서 여지없이 나를 발견하고야 만다. 영국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6시부터 BBC의 날씨를 30분 단위로 체크하였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당일의 날씨는 가장 큰 매개 변수이기 때문이다. 당일 날씨에 따라 그날 판매할 메뉴들의 식자재와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 분량이 결정된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끼고 살았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그것도 이곳 산중에까지 와서 나의 모습을 여동생에게서 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연결 고리들이고 그 고리 들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 자체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영국에 있는 아이에게서 마스크를 보내달라는 카톡이 왔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보람이 있었다. 바로 다음날 영국에 있는 아이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왔다. 마스크가 필요하니 급히(?)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이가 급하다는 말은 안 했지만 왠지 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마스크가 필요 없다고 보내지 말라던 아이였다. 한 달 사이에 유럽 국가들 중 영국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부터 보리스 존슨 총리까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영국은 페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망자 숫자로도 이태리나 스페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가게와 식당 및 술집들은 강제로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딜리버리와 테이크 어웨이(아웃)만 허용되고 있었다. 뉴스 보기가 겁이 날 지경이었고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영국의 아내도 아이도 친구들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그저 시간을 견뎌낼 뿐이었다. 견디는 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육중한 시간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을 의미하고 있었다. 연초에 아이가 아빠를 보려고 잠깐 한국에 다녀갈 당시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면역력이 걱정되어 산중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내가 20년 동안이나 살아왔던 영국과 유럽의 모습이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를 자랑하던 유럽의 국가들이 그깟 바이러스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코로나 19 이전에도 스페인 독감이나 페스트 등을 경험하면서 바이러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이 무너지는 것을 전 세계가 지켜보면서 향후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자만이 살아남는 면역력과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면역력이 최악인 나는 생존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질지도 모른다. 언제 어떻게 또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금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벌써 이번 가을의 대유행을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직 이 무서운 사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면역력이 걱정되어 산중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것이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아두는 것처럼 아이를 위해 꼭꼭 보물단지처럼 숨겨둔 마스크를 들고 읍내 우체국으로 향하였다. 산중에서 우체국에 가려면 읍내까지 승용차로도 제법 나가야 한다. 마침 주말에 조카 결혼식에 입고 갈 양복도 세탁소에 맡기려고 챙겨 들었다. 경조사에 무관심한 나지만 차마 조카 결혼식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사람 노릇 하기 쉽지 않은 나라다.
런던으로 마스크를 보내는데 2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세탁소에 먼저 들러 세탁물을 맡기고 우체국으로 향하였다. 좁은 길에는 불법 주차된 차들이 가득 차 있다. 이를 단속하는 카메라만 혼자 바삐 움직였다. 불법 주차된 차량의 번호를 전광판에 표기하며 경고 메시지를 보내지만 시골 사람들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듯했다. 불이라도 나면 소방차가 지나가야 하는데도 읍내 도로들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또한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아도 마치 보지 않은 것처럼 넘어가야 한다. 아침부터 괜한 것으로 나의 삶이 슬퍼지려 한다. 마침내 우체국에 도착하였다. 읍내 우체국답게 제법 큰 규모의 건물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번호표를 뽑으며 북적이던 서울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안내해주는 분이 미소로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해외로 마스크를 보내려 한다니까 인터넷으로 먼저 예약을 해야 한다며 해당 부서로 안내해 주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런던으로 마스크를 보내는데 2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아내 이름이 빠져 있었다.
먼저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읍내에 있는 군청에 갔다. 군청에서 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무척 당황스러웠다. 가족관계 증명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 번째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이미 6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발급 버튼을 눌렀더니 이번에는 나와 아이만 달랑 나와서 당황하였다. 나의 뇌리에 가족이란 항상 아내와 아이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인데 아내가 명단에서 빠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오질 않나, 멀쩡한 아내가 빠지질 않나, 아직까지는 무인시스템이나 AI는 한계가 있다며 괜한 500원의 추가 비용을 탓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전입신고까지 하려고 물어보니 전입신고는 관할 읍면사무소에서 하라고 한다.
투덜거리면서 군청을 나서는데 햇살이 레이저처럼 강렬하게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데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강렬한 햇살에 자극을 받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아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나는 5개월 전에 아내와 이혼해서 법적으로는 완전한 남이 된 것이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종이 한 장에 고스란히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아내는 더 이상 나의 가족이 아니라고 가족관계 증명서가 친절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이제는 완벽한 남인 것이다. 가족관계 증명서라는 것도 낯설었지만 거기에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진 것은 낯섦 이상의 것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큰 상실이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어머니를 잃었을 당시의 상실 이상이었다. 어머니의 상실로 인한 슬픔과 그에 따른 온당한 위로를 해줄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우주 전체의 중력에 맞서던 아내의 상실에 대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어쩌면 아이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아내도 아이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이혼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바로 올해 1월에 서울 가정법원에 내발로 걸어가서 내가 직접 판사의 판결문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그 길로 서초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를 한 것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날 비가 내렸지만 우산 대신 나의 한 손에는 기내용 케리어가 들려 있었다. 마침 그날이 무릎 수술을 위해 입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입원을 하면서 몸이 너무 힘들었던 탓도 있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뇌의 망각 기능을 더욱 활성화시켰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지능적이고 자기 합리화에 능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준비해 간 마스크 절반은 다시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아이에게만 보내고 아내에게는 보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디 마스크가 런던에 있는 아이에게 무사히 도착되길 바랄 뿐이다.
마스크 하나 보내는 일에도 우체국 직원의 도움이 컸다. 그깟 마스크 하나 보내는데 직원 두 명이 달라붙었으니 말이다.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해외로 보낼 수 있다는 생뚱맞은 제도는 나도 직원들도 지치게 하고 말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우체국 직원들도 알지 못하였다. 단지 상부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온라인이 아닌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이중으로 처리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결국 현장에서 직원이 온라인 예약을 했고 동시에 런던의 아이에게 EMS(국제특급우편)로 마스크 24장을 보낼 수 있었다. 런던의 집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우편번호가 생각나질 않는다. 해외로 보내는 마스크는 3개월분인 24장이 최대 허용치였다. 가족에게만 보낼 수 있고 마스크만 분리해서 별도로 보내야 한다. 그 안에 다른 물건을 같이 보내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현지에서는 우편물의 마스크 분실 사고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품목에 마스크라고 기재되어 있으니 몇 장 빼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지 싶다. 배달하는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면. 부디 마스크가 런던에 있는 아이에게 무사히 도착되길 바랄 뿐이다.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