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남자 Jun 05. 2020

그때 모든 걸 버리고 스님이 되었더라면..

어쩌면 우리 부부는 전생에 스님이었을지도..

                                                         

 “아내가 폭탄을 던졌다. 여보! 나 비구니가 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 우리 집 근처에 한국 스님이 운영하는 절도 생겼다니까!”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고양이와 아이가 어렸으니 1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런던의 집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데 아내는 고기를 한두 점 먹다 그만둔다. 고기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날씨는 화창했고 오후였던 걸로 보아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느슨하고 한가한 봄날 오후에 나는 정원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웃자라서 꽃이 피기 시작한 잔디와 무성해진 나무 가지들을 손질하였다. 내친김에 떨어진 꽃 사과 열매를 갈퀴로 긁어서 꽃 사과나무 아래에 모았다. 이미 썩어가고 있었으니 거름이 되어 다시 자기가 달려 있던 나무에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 또한 자연계의 순환이고 윤회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바비큐를 위해 차콜(조개탄)에 불을 붙였다. 차콜은 쉽게 불이 붙지 않지만 일단 붙으면 화력이 대단하다. 차콜 특유의 연탄구이 맛을 낼 수 있어 장작이나 숯보다는 차콜을 선호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바비큐에는 근처에 사는 Y가족이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서 아내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나는 당황하였지만 Y부부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웃었다.
 
 “언니 요즘 힘든 일 있지? 괜찮으니까 말해봐.”     

 아내는 아니라고 웃으며 넘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아내가 단순히 고기 때문에 스님이 되겠다고 하진 않았다. 돌이켜보니, 그 무렵부터 우린 각방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내가 코를 너무 골아서였다. 아내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였다. 그게 서로 편했고 그 무렵부터 우린 부부이긴 하지만 대면 대면한 친구가 되어갔다. 서로에게서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다툼도 없어졌다. 대화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맴돌았고 서로는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려들지 않았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일지도 모른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우린 벌써 대면 대면해지고 다투지 않는 것일까! 나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기에 아내는 스님이 되겠다고 했을까! 사실은 나 또한 스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불교 관련 책들에 심취해 있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흘러내리는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나의 문제를 찾아야만 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결혼 전의 나부터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지 않는 동물이니깐.
     
척하는 삶들은 허세와 허영이 가득해서 진솔함이나 나다움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이미 멀찌감치 달아나버렸지만, 나의 청춘은 제법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다워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내가 나 자신을 들들 볶아대던 날들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내면의 나와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나는 항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척하는 삶들은 허세와 허영이 가득해서 진솔함이나 나다움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난 철저하게 두 가지 이상의 얼굴로 살았다. 그것도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였을까! 외부에 드러내는 나는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 거기에 외골수도 추가된다. 안타깝게도(?) 아들 녀석이 나의 성격을 닮고 말았다. 결혼 후에도 항상 일을 저질렀고 사고를 쳤다. 물론 수습은 아내가 하였다.
     

 나는 잠시도 쉬면 안 되었다. 무슨 일이든 만들고 꾸미고 벌여야만 했다. 그 시절에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코 “지금 “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그 무엇들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실패와 좌절이라는 단어를 곱씹어야만 했다. 실망스러웠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친구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또래의 한인 중 런던 시내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혀왔다.  

발버둥 치며 허우적거리기까지 한 청춘이 아름다웠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뭘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 아팠다. 밥을 먹다 체한 것처럼 답답하였다, 주춤거리고, 방향을 잃은 채 허우적거리면서도 결코 멈추지 못하였다. 어디에 선가는 멈추어야만 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였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넋 놓고 앉아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런 청춘의 발버둥들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나의 그 불안하고 브레이크가 풀려버린 성격은 결혼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난 그게 장점이라 생각했지만 아내에게는 커다란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꿈만 크고 중심도 잡지 못한 채 그저 표류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알 것도 같으면서 잘 모르는 나였다. 난 늘 ”봉“이었고 ”호구“였다. 런던에 정착하는 과정인 이민 초기에는 더욱 그랬다. 런던과 한국에 있는 머리 좋고, 약삭빠르고, 돈 냄새 잘 맡는 한인들에게 무던히도 (이용)당했다. 그 당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이야기할 작정이다. 그전에, 결혼 전 한국에서의 ”호구“ 이야기가 먼저인 거 같다.

붕어빵 사듯 그 자리에서 자동차를 산 남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연락은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이었다. 세 번째 친구는 자동차 영업소에서 근무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들의 영업 수완이 탁월했거나 내가 좀 어리숙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둘 다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종신부터 각종 암까지 보험을 몇 개 들었고 자동차를 그날 바로 샀다. 자동차 영업하러 온 친구는 아예 ”아반떼”라는 신차를 직접 몰고 왔다.
     

 그날은 12월 초였고 아침부터 첫눈이 날리고 있었다.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안부만 묻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차가 필요할 것이라며 지금이 구매 타이밍이라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였을 것이다. 친구는 첫눈이 날리는 날에 계약서에 서명을 먼저 해야 한다며 찾아왔다. 전화가 울렸고 나는 지하 아케이드로 내려갔다. 그는 빌딩 지하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를 넘기면 차 값이 폭등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며 계약서를 들이밀었고 얼떨결에 나는 서명을 하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차는 3년 할부로 사는 거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그 친구가 적기에 들이댄 것이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자 그 친구는 시승을 해보자면서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H사의 고양이 눈 모양의 브레이크 등을 가진 하얀색 차였다. 나는 얼떨결에 열쇠를 받았고 10여분 정도 시승을 하였다. 근무 시간이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이젠 들어가야 한다고 하니까 그 친구는 잠깐만! 하더니 계약서와 함께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었다. 붕어빵이나 호떡을 사듯 그렇게 얼떨결에 자동차를 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장롱면허"로 눈물의 미아리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장롱은 필수품이었다. 지금이야 붙박이장이어서 장롱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운전이라고는 정말 면허시험장에서 해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런 내가 퇴근하자마자 금방 건네받은 차를 이끌고 남산 근처에서 수유리에 있는 집까지 가야 했다.

 첫눈은 제법 내렸고 성신여대를 지나서 마의 미아리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오토도 아닌 수동 기어의 신차를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퇴근 시간이라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차는 뒤로 밀리거나 시동이 꺼졌다. 죽을똥을 싸며 수유리에 도착했을 때는 와이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주차는 또 왜 이렇게 힘이 들던지! 겨울에 그렇게 땀을 흘려보기는 처음이었다. 보험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보험뿐인가! 정치판에도 잘못 뛰어들어 개고생을 하였다. 영업을 마친 사람들은 연락이 뜸해지더니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두절이 되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차와 보험뿐만 아니라 결혼과 이민도 "충동구매"였다. 아내에게 지금도 미안해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내면의 나와 외부로 향하는 나는 늘 갈등하고 다투었다. 내가 하는 행위들은 항상 주저하고 망설였지만 중차대한 결정은 즉흥적이다. 그때마다 혼란스러웠고 나 자신이 싫었다. 사귀던 연인들이 떠나가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성격 때문이었다. 실연을 당할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그래도 다음에 올 연인을 위해 나의 목숨만은 부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청춘은 무얼 해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당시 나의 사전에 "우울" 따위는 없었다.   


그때 모든 걸 버리고 스님이 되었더라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차를 몰고 강화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라는 절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곳에만 가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어쩌면 거기에서 삭발을 하고 속세와 연을 끊을 것만 같았다. 당장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의 나의 모습은 삭발을 하고 누더기 장삼을 입은 스님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여 마치 꿈을 꾸거나 아니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와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실연을 당할 때마다 부처님이 나를 위로해주는 기분이었다. 바쁘신 부처님이 존재감조차 없는 나까지 챙겨주실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욱 스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단지 마음에서만. 하지만 스님이 되려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즉,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다.   
   

 당장 직장부터가 문제였다. 다니던 직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다음 연인이 될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의 부인이 될 아가씨도 다 포기해야만 했다. 솔직히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과의 이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기 때문에 가족과의 연을 단절하는 일은 당장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못하였다.  
    

 다른 일은 다 결단을 내렸지만 속세와의 단절이라는 결단은 끝내 내리지 못하였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결과물인 나의 "업보"는 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비구가 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기독교에 입문한 아내는 그날 바비큐 파티에서 고기를 멀리하면서부터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나는 업보를 짊어지고 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부부생활을 하는 일상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뭔가 어색하였다.    
   

 남녀가 서로 끌린다는 것은 분명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단지 외모만으로도 느낌이 오기는 하지만 그 외모 안에는 DNA의 오묘한 조화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스님이 되지 못한 채 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방황해야만 했다. 아픔은 필연이었고 슬픔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이혼이었고 가족관계 증명서에서 아내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부부에게는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