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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31. 2020

바느질 하다가 런던의 아내 생각이..

남자는 자기 특질에 잘 적응하는 여자를 만나면 미쳐버린다.

 살다보니 부부의 실타래가 엉키고 말았다. 실마리를 찾지 못해 결국은 가위로 자르고 말았다. 동시에 우리의 인연도 두 조각이 났다.

  
 혼자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바느질을 하게 된다. 나에겐 12가지 정도 색상의 실타래와 몇 개의 바늘이 있다. 단추 하나만 떨어져도 내손으로 직접 바늘에 실을 꿰어서 달아야한다. 단추 하나 달자고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세탁소에 가져갈 수도 없다. 아내와 정반대로 브랜드를 선호하다보니 옷들을 오래 입게 된다. 오래된 옷들의 단추들은 자주 떨어졌고 그 때마다 바느질을 해야 했다. 실타래를 꺼내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색상을 고른다. 묘하게도 실타래를 만지작거리면 영국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아내가 바느질을 전적으로 해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내는 차분하면서도 아주 가끔은 욱하는 면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로 인해 자주 욱하긴 해도 성격이 급하진 않았다. 아내는 실타래가 엉켜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그리고 버렸다. 복잡한건 딱 질색이다. 단순한 삶을 추구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미니멀리즘을 추구했고 환경을 생각했다. 반면, 나는 어떻게든 엉킨 실타래를 풀어서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스타일이다. 엉덩이도 무겁고 뭐든지 끝을 보는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겨우 세 자리수의 턱걸이 아이큐로도 꽤 괜찮은 대학에 갔다. 아내는 멘사 회원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다. 살아가면서 느꼈다. 세상은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보다. 머리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할 때 행복에 1밀리미터라도 가까워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단추를 달려고 실타래를 만지작거리며 오랫동안 아내생각을 하고 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문득 아내에게 편지가 쓰고 싶은 날이다.

 
 실타래!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나와 아내의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문득 아내에게 편지가 쓰고 싶은 날이다. 주말과 휴일 내내 남도의 산중에는 비가 왔다. 주말에 잠깐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전주에 다녀왔다. 결혼식장에서 늠름하고 잘 생긴(내 눈에는) 조카가 결혼식을 하는 모습을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마치 내가 아내와 결혼하는 당시의 기분과 감정과 설렘이 동시에 소환되었다. 20년 전 이맘 때, 나도 조카처럼 긴장하며 늠름한 척(?) 결혼식을 했다. 그 때는 온 세상이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에 가족 친지와 지인들을 초대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은 사실 나의 인생 다이어리에는 없었다. 일상은 수많은 변수의 퍼즐들이 그럭저럭 맞추어져 나름 조화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 변수중 하나가 바로 아내를 만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인연이었고 당연히 조화로운 퍼즐이었다. 제대로 맞는 수제 구두와 맞춤 양복처럼 완벽한 조화였다. 헐렁한 기성품처럼 뭔가 맞지 않는 부조화였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연애와 결혼의 단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이성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가설은 나에게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 고마웠다.      


 아내는 내가 영국 이민 전까지 운영 중이던 봉사단체에서 만났다. 2월말의 눈 내리던 어느 날 봉사지의 빨래터에서 이불 빨래를 같이 하면서였다. 그날 처음 아내를 보았다. 사랑의 감정은 0.1초 사이에 결판이 난다.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던 나였지만 그 순간 사랑의 감정보다는 먼저 결혼을 확신했다. 아내가 어떤 성격을 가졌고, 아내의 장단점은 무엇이고, 아내의 취미나 취향이 어떤지는 중요치 않았다. 사랑 하나만으로 어떠한 난관이나 역경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겨울의 끝자락에 처음 만나서 봄이 시작될 무렵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몇 차례 데이트를 한 다음 곧바로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     



 조카의 배우자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조카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이었다. 20년 전에 나도 저랬을 것이다. 사실, 10년을 연애해도 막상 결혼해서 살면 사소한 일부터 중차대한 일까지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문제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생기는 충돌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아내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남편은 남편대로 육아에 협조를 하며 집안일도 거들고 직장 생활도 더 열심이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육아에 대한 "협조"라는 단어조차도 함부로 쓸 수 없다. 아내만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소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여 결국은 상처가 되고 만다.            

 

 문제는 소통이었다. 아내는 별일도  아닌 문제들은 그냥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문제들조차 서로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배려"의 차원에서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은 항상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소함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기 마련이다. 그 범위가 커져도 습관처럼 문제가 되는 것들을 사소함의 창고에서 꺼내지 못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창고에 있는 문제들은 곪아 터지기 시작하였다. 창고는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엉킨 실타래처럼!    
       

 조카 녀석은 지난해 자기 동생 결혼식 때 여자 친구를 나에게 인사시켜 준 적이 있다. 그때도 5월초였고 황금연휴였었다.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인지, 아니면 동생이 더 잘생겨서인지 몰라도 형은 주눅이 들어있었다. 내년을 기약하던 녀석은 어수선한 시국에 쉽지 않게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너무 행복해 보였다. 많은 하객들이 몰려오면서 모두가 당황하였지만 결혼식은 짧고 소박하게 잘 끝났다.     
      

 사실, 지난해 녀석의 동생 결혼식 때는 사촌 여동생의 부고가 전해지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대낮에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사촌 여동생은 사망한지 100일 만에 발견되었고, 다행히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될 즈음에 부고가 전해졌다. 인생이 아무리 예정대로 흐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하필 조카의 결혼식 날 그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사촌 여동생은 자신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그렇게 알려왔다. 다행스럽게도(?) 올해는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결혼식이 끝났다. 결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파를 피해 다시 산중으로 들어왔다.     


 부부가 남이 되어간다는 일은 아주 오래된 슬픔을 꺼내보는 일이었다. 심지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마스크조차 보내지 못하는 일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산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대같은 비가 내렸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는 비에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 또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장대처럼 내리는 빗속을 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아내와 함께한 세월들이 두서없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아이의 엄마와 아빠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며칠 전 영국의 아이에게 마스크를 보내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해외로 마스크를 보내려면 사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 무인 발급기로 발행된 그 증명서에는 아내 이름이 빠져 있었다. 나와 아이만 가족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나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날씨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비라도 내렸다면 나는 눈물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내의 가족은 아내와 아이 둘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남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아내에게는 마스크를 보내지 못하고 다시 가져와야만 했다. 남이 된다는 일이 마스크조차 보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위로가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읍내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북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심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펜션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군청에서 우체국으로, 우체국에서 다시 펜션으로 따라올 것만 같았다. 산중으로 이사 와서 처음 나와 본 읍내였다. 어딘가에 들어가서 소주라도 한 병 마시지 않으면 그 북소리에 나의 영혼은 난도질을 당할 것만 같았다. 몇 시간 동안 읍내를 배회하다 결국 펜션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지만 나를 위로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욱 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위로가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아무 이야기라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심장에서 요동쳐서 쏟아져 나오는 북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연에서 꿈틀대던 우울감이 줄도 서지 않고 한꺼번에 몰려나오면서 세상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지기 시작하였다.     


 요즘은 어지간하면 우울이나 불안 또는 불면 같은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요즘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70억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우울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끝나버린 일들을 가지고 언제까지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또한 심리학에서 말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피해자 징후 중 하나일지 모른다. 나처럼 어떤 일에 대해 심하게 자책하거나 집착하는 증세다.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우리가 몇 달 전에 확실하게 이혼을 했고 서류상으로 완전하게 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남들도 다 하는 그깟 이혼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삶을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주변에는 이혼 한 사람이 더 많다. 영국이든 한국이든 이혼은 이혼일 뿐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혼은 별일도,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협의 이혼을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도 나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이혼을 하고 보니 내가 왜 결혼을 했는지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다이어리에는 분명 결혼에 대한 일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성들을 만났고 사귀었다. 대부분의 결말은 내가 차이거나 까였다. 그 이유들도 가지작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고 뭐가 잘못이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것 자체도 우습다. 모두 지난 과거일 뿐이다.     


인생의 다이어리에 없던 일을 있던 일로 바꾸려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인연이 필요했다.     


 사랑이란 파도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래서 여자들도 밀려왔다가 밀려갈 뿐이라고. 마치 파도가 그러한 것처럼. 하얀 물거품으로 허세를 부리며,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파도가 금방 초라한 모습으로 물러나는 일. 비록,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몰려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실체였다.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한 사랑의 본질은 단순했다.

 “인간이 본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거의 성욕뿐이다. 그것은 곧 인류를 지상의 무대에서 계속 존속시키려는 신의 의지 속에서 발견된다. 남자는 자기 특질에 잘 적응하는 여자를 만나면 미쳐버린다.”     
   

 주말에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조카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남도로 내려오면서 아내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비가 변수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우리의 사랑과 결혼 자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사랑과 결혼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욕심은 종족 보존의 지극히 단순한 욕심이었으리라. 세상 모든 생명체가 품고 있는 지극히 본능처럼 단순한 욕심.
 
  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많은 우연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우연을 인연으로 포장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생의 다이어리에 없던 일을 있던 일로 바꾸려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인연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었고 많은 회원들을 관리하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청춘은 모순덩어리들을 잉태한 채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애당초 봉사모임을 만든 일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나부터 나서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근거가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 또한 욕심이었다. 이미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해 헌신하다 죽어갔다. 그중의 한 사람이 예수였고, 싯다르타였고, 마호메트였다. 이들의 삶을 흉내조차 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청춘을 부여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그마한 빛이라도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청춘을 그대로 강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의 시계는 초를 다투며 흐르고 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 째깍거리는 초의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성인이나 선지자 또는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청춘을 아름답게 포장해야만 했다. 그랬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나의 청춘이 우울해할 시간도 무기력할 날들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치판에도 기웃거려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봉사단체를 만들어서 회원이 수 만 명에 이르는 조직을 운영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반납하던 시간들이 가장 아름다운 청춘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같은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바로 위 오빠라는 작자는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결혼식장의 신부 대기실에서 대기 중인 여동생 얼굴을 몇 분 보고 다시 여주 라파엘의 집으로 달려가던 시절이 그랬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1분 정도의 얼굴 도장만 찍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지금 나를 보살피는 여동생의 오빠인 나란 인간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청춘들은 수많은 모순덩어리들로 가득차고 있었다. 가식과 허세의 포장들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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