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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22. 2020

결혼이 신의 장난이라구? 그럼 이혼은?

#12. 가정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 정말 가정 문제는 해결될까?

 결혼이 신의  그럼 이혼은?
 며칠 전, 이혼한 아내와 오랜만에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단지 텍스트 몇 자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날 선 공방이 이어졌다. 마음속엔 다시 태풍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어 차를 몰고 바다 쪽으로 달리다 보니 완도항이었다. 완도항에는 마침 제주행 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에 차와 몸을 무작정 실었다. 갑자기 높고 낮음이 없는
망망대해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그라들어가던 감정의 불씨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게 방치할 순 없었다. 그래서 지금 며칠 째 제주도의 위미항이란 작고 조용한 마을의 호텔에 묵고 있다.

 오늘은 흐렸다. 비는 그쳤지만 한라산 성판악과 영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어젠 서귀포 앞바다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제법 오랫동안 빗방울이 떨어지는 남쪽 바라를 바라보았다. 백록담과 기생 오름들의 분화구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면서 굳어버린 검은 현무암 해안들에도 빗방울들이 촘촘히 박히고 있었다. 태고적부터 자리 잡고 있던 검은 해변에 태고적부터 내리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현무암들 위에서는 용암의 마그마가 식을 때 분출되던 증기들로 자욱해 보였다.

 섬에서도 남쪽 끝이어서인지 깊어가는 가을비인데도 아직 온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신혼부부나 에비 신혼부부로 보이는 많은 커플들은 우산에 우비까지 챙겨서 농익어가는 제주의 가을을 탐닉하기 바빠 보였다. 하지만 내겐 그 흔한 우산 하나 없었다. 편의점에 가서 살까도 고민했지만 사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 나처럼 버려질 우산의 운명에 대한 배려였다고나 할까.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제주에는 신혼여행객들과 젊은 커플들로 북적였다. 호텔에서도 호텔을 나서서도 젊은 커플들과 자주 마주쳤다. 그들에게는 재벌가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있었다. 그들이 바로 세상을 다 가진 진정한 부자처럼 보였다. 내심 부러웠다. 나에게도 저런 풋풋하고 황홀한 시절이 있었는데. 저들과 달리 지금 나는 이혼의 아픔을 홀로 견디고 있다. 언젠가는 떨쳐 내고 말겠지만 지금은 쉽지 않다. 몇 번의 가을을 더 보내야만 이혼한 아내와 친구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세상의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재창조되려면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알을 깨트려야만 한다. 알을 깨트리고 나오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과거에 갇혀 살면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나버린 아름다웠던 시절의 순간들은 더 이상 추억조차 되어줄 수 없다는 듯이 현실 앞에 무릎을 털썩 꿇고 말았다. 남편이란 직책에서 해고당하던 그날도 어제처럼 비가 많이 내렸다. 까마득한 과거라고 여기고 있던 그날은 돌이켜보니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각자에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닫는다. 나의 시간들은 잊히고 싶어 안달이 났음에 틀림없다.



 그날 서울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남편이란 직무에서 해고당하던 올해 1월 7일 화요일 아침에 나는 우산이 없었다. 양재동의 서울 가정법원 2층에 위치한 협의이혼실은 고객들로 소리 없이 북적였다. 대기실에는 많은 커플들이 한 손으로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누구 하나, 몇 분 후에 이혼해서 남이 될 배우자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의자를 사이에 두고 한두 칸 띄어 앉아서 어색한 시간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배우자들의 얼굴 대신 부부들의 이름이 적힌 전광판의 순서를 표정 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말 운명의 시간과 장소에서 부부의 이름은 가운데 글자가 별(*) 표의 기호 문자로 처리되어 있었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부부의 이름을 가려주는 배려였다. 하지만 배려로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진보하고 있는 세상에서,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이혼은 숨기거나 가려줘야 하는 치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보여 아쉬웠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나와 아내의 이름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만 했다. 나는 생뚱맞게도 뜬금없이 그들의 결혼식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물론 나의 결혼식 장면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때에도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적어두고 예식을 치렀던 커플들이 어쩌다가 이름을 가리고 이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랑스럽고 당당하기까지 한 커플들이 자신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가려야만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어쩌다가 그들과 우리 부부는 다시 원점이 아닌 원점보다 월씬 좋지 않은 지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믿었던 사랑의 배신일 수도, 힘겨웠던 지난 삶의 배신일 수도, 시대의 우울과 광기의 희생양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짓궂은 운명의 장난일 수도 있단 말인가.  
  

 한 때는 정말 미친 듯이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치 서로 머리를 맞대고 그렇게 앉자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칸씩 떨어져 앉은 거리의 괴리감은 크고 넓고 멀어 보였다. 그 사이에는 한 겨울 시베리아의 높고 푸른 침엽수림의 나무 사이들을 관통할 때나 가능할 것 같은 찬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며 한두 칸씩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를 충실하게 실천하며 앉아서 짧지만 긴 침묵은 대기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코로나 사태도 터지기 전이었는데 한 달 후에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사회적 거리두기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무리 중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옆에 아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다. 아내가 런던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협의이혼신청서를 접수했기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이 동시에 법원에 나타나서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참고로 협의 이혼의 최종 선고일은 1주일을 간격으로 1차와 2차의 두 차례 기회가 주어진다. 부부가 동시에 법원에 나타나서 최종 선고를 판사로부터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동시에 참석하기 쉽지 않은 커플들을 위한 배려로 보였다. 아이가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3개월 전에 법원에서 미리 호출해 상담과 교육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3개월간의 숙려기간을 갖게 한다. 양육할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1개월의 숙려기간을 둔다. 그 이유는 숙려기간 사이 혹시 마음이라도 변해서 이혼소송을 취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유지시키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겪게 될 고통을 줄여보려는 사회와 국가차원의 배려인 것이다.     

 대기석의 마지막 줄 중간쯤에 혼자 앉아있던 나는 앞에 앉아있던 타 커플들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민감해졌다. 그들이 작은 소리로 다투기라도 하면 귀를 쫑긋하며 그 내용을 몰래 엿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나도 그렇다는 공감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 공감은 많을수록 위로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허튼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다툼은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두고 상대방 탓을 해봐야 부질없는 에너지 소모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내 차례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돌아보면 세상사는 모두 연극이라는 말이 맞나 싶다. 어디서 주워들은 그럴싸한 이 문구가 떠오르자 허탈함을 느끼며 급속한 피로가 밀려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처럼 나의 폐부를 찔러대며 와 닫는 말도 없을 것이다. 눈치 없는 피로를 애써 무시하며 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안면 근육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미세하고 가녀린 경련은 내가 쓴웃음을 지어야만 나타나는 근육들의 익숙한 떨림이었다. 물론 근육들의 자발적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그 미소를 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을 강요당한다는 느낌이었다. 결혼생활 내내 아내에게 많은 것들을 강요당할 때 느꼈던 바로 그 떨림이었다.     

 판사님 옆에서 나의 이혼 서류를 살뜰하게 챙기시던 남자 주무관님은 무뚝뚝해 보였지만 친절했다. 내친김에 옆의 서초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안경 너머로 영혼 없는 위로까지 건네주셨다. 가정법원과 달리 서초구청은 떠들썩하고 북적였다. 백색소음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민원실의 가족관계부서에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 그것으로 아내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남편이라는 직무에서 나를 해고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내는 단지 서류상의 정리일 뿐이라며 모든 것은 기존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애매하고 두리뭉실하게 말했지만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었다. 며칠 동안 제주의 곳곳에서 스쳐 지나가던 신혼부부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미소가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결혼해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끊임없이 참고 견디며 살아내는 커플들이 정상일까? 아니면 잘못된 현상을 바로잡으려 별거나 이혼을 불사하는 커플들이 정상일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지 아니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정을 희생시킬지는 선택의 문제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인내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진정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할 것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배우자나 아이들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아닌가?

 결혼은 서로 맞지 않는 사람끼리 맺어주는 신의 장난입니다. 결혼을 통해 인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데 의미가 있지요. 결혼으로 인생을 망치느냐, 아니면 포용력이 큰 사람이 되느냐 둘 중 하나예요.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고바야시 미키. p260>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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