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영국 M&S(Marks and Spencers)에서 판매 중인 홍백합
인간은 누구나 이 우주를 새로이 출발시키며 탄생한다. <한나 이렌트>
감정이란 무엇일까? 요즘 나의 화두는 감정에 꽂혀있다. 감정의 노예가 되고 나서 자주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는 중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내가 감정을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버렸다. 어쩌면 그마저도 완벽한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내 감정을 단 한 번이라도 지배한 적이 있었던가! 단순히 걱정이나 우울 또는 불안만이 문제가 아니다.
요즘 들어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낯선 감정들에 휩싸인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생경한 감정들이다. 백주 대낮에도 꿈을 꾸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랫동안 억눌려서 억압받던 무의식이라고 하는 감정 들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지옥처럼 보이는 입구에서 서성 거리기도 한다. 그때마다 마음에 균열이 생기면서 서로 죽일 듯 싸운다. 오만 감정이 나를 지배한다. 내 안에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들이 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수선하다. 숨이 가쁘다. 순간순간 나의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불편한 마음들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 불편한 감정들은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가며 나를 괴롭힌다. 이유까지 말해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마치 나의 질병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도 모르고 모르는 것들도 모를 뿐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암흑에 갇히고 만다.
멀쩡하던 마음들은 순식간에 쪼개지면서 날카로운 파편들이 된다. 그 파편들은 언제라도 나를 찌르려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날들을 한껏 새우고 있다. 그 날들이 날카롭게 느껴질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덩달아서 우울의 강도도 높아진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대 반전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마음들이 파도를 타며 서핑을 즐긴다. 신이 난다. 순식간에 밝은 미래가 내 앞에 장밋빛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한번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전형적인 나의 내면세계다. 밝은 감정과 어두운 감정은 나라는 자아를 이루는 두 개의 핵심 축이다. 긍정과 부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날엔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금방이라도 균형이 깨져버릴 것만 같은, 그래서 온 세상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무섭도록 적막한 긴장감에 빠져든다. 내 육신의 세포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안절부절못한다. 슬프다.
올해 초 해가 바뀌면서 이혼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홀가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자주 울렁거렸다. 마치 가슴 한쪽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마치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보이는 푸르스름한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리듯이 마음은 자주 무너져 내렸다. 왜 자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지는 역시 모른다. 미래지향적이던 내가 자주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심지어 나이 탓이려니 하는 마음조차도 위로받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자주 뒤를 돌아보고 만다. 어린 시절 으슥한 밤중에 골목에서 느꼈던 감정과 유사하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거대한 세계가 극히 작고 초라한 의식의 세계를 압도하고 만다.
혼자 야심한 골목길을 총총걸음으로 걷다가 불쑥 뒤를 돌아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결국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럴 때는 무작정 앞만 보고 뛰었다. 한참 달리다 보면 다시 뒤가 궁금해진다. 힐끗힐끗 뒤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공포는 완벽하리만큼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숨이 막힐 만큼 두렵다. 이런 시간들에 사로잡힐 때마다 마음은 요동친다.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다.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의 고통은 또 다른 절망과 마주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뒤돌아보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간다. 아침이 오는지 석양이 지는지도 불분명한 하루가.
이제 외로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뭐든지 자주 접하고 마주하다 보면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익숙해지나 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글을 쓰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 잠을 자며 혼자 꿈을 꾼다. 물론 꿈속에서도 혼자다. 지독하리만큼 혼자의 인생으로 살아간다. 다행히도 혼자만의 라이프가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입증해내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편안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누군가로부터의 간섭이 그리워질 때면 가끔 눈물이 난다. 슬픔이란 처량한 감정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아니면 눈물이 나서 슬픔이란 감정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혼자만의 시간들이 깊숙해질수록 내면의 마음들은 여기저기서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민다. 왜 그럴까! 나만 그런 것일까?
내가 느끼는 가장 슬픈 감정은 혼자라는 “고립감”이다. 점점 혼자만의 시간들에 익숙해질수록 고립감은 깊어진다. 무인도에 혼자만 달랑 남겨진 채 죽을 때까지 홀로 생존해야 한다는 감정은 참 슬프다. 누군가와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평생을 혼자 살아간다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무인도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심지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조차 의미를 잃어버리진 않을지 궁금해진다.
일상에서의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립감은 혼자이기에 더욱 활성화되는 듯싶다. 굳이 무인도를 연상하지 않아도 황량하고 쓸쓸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고립감을 고독으로 승화시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어쩔 수 없기에 견뎌내는 일은 때로는 어떤 특별한 힘이 될 수 있다. 특별한 힘을 보통은 내공이라고도 하고 초월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해탈까지는 감히 바라지 않지만 어떤 현상에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니체가 말했던 초인 사상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큰 산들은 물론이고 우주의 공간들을 넘나들 수 있는 초인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사유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일이 애당초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렇게 매일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살기도 바쁜데.
누군가가 죽으면 그의 우주도 함께 소멸하고 만다. 자주 죽음을 접하고 나 스스로도 죽고 싶지만 세상의 어떠한 죽음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불멸은 아름답고 소멸은 슬픈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화병에 꽂혀있는 생화는 아름답다. 화병 속의 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시들고야 만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들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조화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말라가는 백합은 소멸 직전 가장 크고 아름답게 만개한다. 강렬한 향을 내뿜으면서 마지막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시들어간다. 마치 생의 마지막 눈물이라도 흘리듯 세상에서 가장 진한 노랑의 꽃가루를 뚝뚝 떨구고 만다. 때론 밤새 산중 암자의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처럼, 때론 여수 오동도나 선운사 뒤뜰의 피보다 더 붉은 동백꽃처럼 청순함과 단아함을 갖춘 꽃잎을 떨구고야 만다.
소멸은 한낮 꽃에게도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아내는 꽃을 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백합을 좋아했다. 런던의 집에서 매주 백합이 질 때면 다른 백합을 사 오던 일이 생각난다. M&S(Marks and Spencers) 백합만을 고집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꽃들에 비해 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주 백합을 사 날랐다. 그렇게 십여 년 이상을 사 날랐는데 백합의 꽃가루나 향이 고양이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아내는 백합 반입 금지령을 내리고 만다. 그 많은 백합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많은 백합들이 아내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소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백합의 하얀 또는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져 카펫 위에 떨어질 애잔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거실을 가득 매웠다. 진한 향기와 함께.
소멸은 순간 아름다울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기쁨이 될 수 없는 감정이다. 기쁨이 되지 못하기에 슬픈 것이다. 감정에 어떤 중립지대나 사각지대가 있다 할지라도 슬픔에 가까울 수밖엔 없다. 소멸하는 감정보다 더 슬프게 느껴지는 감정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오직 나 혼자뿐이라는 고립감은 때론 소름이 돋을 만큼이나 끔찍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그 시간을 모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때마다 더 큰 슬픔이 몰려올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립감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자주 대면하면서 익숙함이란 감정과 손을 잡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감은 막다른 외길이나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나곤 한다. 피해 갈 길이 없다. 온몸으로 관통해서 흡수해내던가 아니면 다리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끔은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지고 싶은, 그래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들고픈 유혹에 빠진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충동적이면서 아름다운 나만의 소멸방식이다. 그래서일까! 꿈에서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떠나곤 한다.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안나푸르나에 말이다.
사실 그동안은 내 안의 일렁이는 감정들에 관삼을 줄 여력이 없었다. 일에 파묻혀 살아오면서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문득문득 뼛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감정들은 외면당하기 바빴다. 한 겨울 냉기처럼 온몸의 피부 세포와 살가죽을 파고들던 감정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혼자가 되고부터다. 혼자가 되려 했던 이유는 모든 짐들을 어깨와 등에서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처음 여행 왔던 그날처럼 완벽한 무에서 삶을 리셋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 안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와 만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나와 만났을까? 일란성쌍둥이일 줄 알았던 또 다른 나는 일란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란성도 아니었다. 닮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기질과 생각을 가진 낯선 사람이었다. 완벽한 타인,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완벽한 타인이라는 감정은 내 육신 어딘가에 낯선 사람 하나가 들어와 사는 느낌이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만 이해나 사랑의 관계가 아닌 이타와 배척의 관계였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감정들이 수시로 일렁이며 때론 망나니처럼 긴 칼을 휘두르며 돌아다녔다. 입에서는 물을 잔뜩 머금은 채 햇살에 반짝이는 칼날을 응시하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망나니가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렇게 감정들은 점점 사나워져 갔고 마침내 광기와 만나고 있었다. 동시에 굵직하고 묵직한 감정들은 불안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외로움이나 고독으로 인한 고립감도 결국은 불안이라는 감정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머지않아 시들어야 하는 꽃병에 꽂힌 꽃들과 같은 운명이기에, 우주에서 하나의 깃털이나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존재이기에 매일 마음이 요동치는지도 모른다. 불멸의 고통 속에서 방황할지도 모르는 신들이 아니기에.
내 몸 안에서 기생하지만 친구로 인정해야만 하는 성난 마음들을 이젠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싶다. 그들도 엄연한 나의 일부라는 사실 앞에 무릎을 땅에 댄다.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너무 달랐다. 자신감과 긍정으로 중무장한 채 희망을 쏘아 올리기 바빴다. 세상에 두려운 것도 불가능한 일도 없었다. 다가올 미래는 언제나 장미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오월이거나 무지개가 떠올라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한 여름의 별천지인 줄 알았다. 불행이란 단어는 나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인 줄로만 알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것이 불행이었다. 좌충우돌하던 20대의 나는 미래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래를 모르기는 지금의 나도, 10년 후의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비극과 희극은 둘 다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세상이 온통 비극일 필요도 희극일 필요도 없듯이 말이다. 내가 매일 느끼는 감정들이 긍정이어도 부정이어도 상관없다. 이들 또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감정들 하나하나에 충실하고 싶다는 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감정들이 요동쳐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감정들을 활자로 기록하고 싶다. 그래야만 무수한 감정들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좀 더 초연해지려 노력한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검푸른 밤하늘의 바다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떠올리며 뿔이 잔뜩 난 마음을 토닥이며 다독인다. 마치 이 우주를 새로이 출발시키며 탄생한 갓난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처럼.(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