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 단편선
우리는 길을 걷고 있었다. 장마가 막 지나간 여름의 한복판이었고, 여전히 그 습한 기운이 장마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아침에는 맑았으나, 오후에는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 기상청은 예언하였다. 그 말대로 하늘은 천천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뜬금 없지만, 그게 마치 내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한차례 호우가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시시때때로 어두워지는 마음. 괜찮아지려다가도, 다시금 휘몰아치는 마음.
"아직도 약 먹고 있어?"
너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응. 바보 같지?"
나는 네게 맘에도 없는 소리로 그리 답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면 먹어야지. 그게 뭐가 바보 같아."
"그냥. 너는 그런 거 없이도 잘 살잖아. 항상 밝게 웃으면서 말야."
"누가 그래. 멍청아."
너는 작게 찡그리면서 웃는다.
그러다 갑자기,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가 하늘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늘은 곧 쏟아부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놀라서는 점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은행 안에 있는 ATM기 앞으로 대피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 흩어지고 도망간다.
나는 가끔 그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내 곁에서 떠나간다고 생각했다. 우울하니 자신감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사라지니 사람들이 나를 따분하게 느낀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내 우울함이 전염된다는 생각에도 사로잡혔다. 그러니 나는 더욱 나를 감추게 되고, 그것이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런 내가 싫다. 그래서 더욱 우울해지고, 나는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가고, 도망치고, 도망친다. 나도 내 마음의 먹구름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나는 여기에 있었다.
코 끝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너는 내게 물었다.
"우산 챙겼어?"
"응. 아까 아침에 일기예보 봤어. 너는?"
"뭘 물어봐 당연히 안 챙겼지. 보면 몰라?"
그랬다. 가방 하나 챙기고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너는, 그냥 나를 만나러 맨몸으로 왔다.
"일기예보 못 봤어?"
"봤지. 그럼."
"근데 왜 안 챙겼어?"
"귀찮잖아. 일기예보가 틀릴 수도 있는 거고."
"내가 챙길까 봐 그런 거 아니고?"
그렇게 말하자, 너는 흠칫 놀라면서 당황하는 거 같았다.
"음... 그건 계산해보지 않았는데."
그렇게 모른체 말하면서 말을 잇는다.
"사실 1퍼센트 정도는 네가 챙길 거 같아서 안 챙긴 거도 있고."
그렇게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렇게 대책 없이 굴고 또 내게 이런 걸 떠넘기는 게 사실 별로 싫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당당하게 사는 게 부럽기도 했고.
그게 나랑은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에, 다시 또 빗방울이 코와 이마와 손등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비 안 맞으려면 조금 뛰어야 할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묻자 너는 말한다.
"있잖아."
"응?"
"너 비 피하는 법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비 피하면서 걷는 법말이야."
나는 같이 우산을 써도 푹 젖을 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는데, 너는 갑자기 쓸데없이 태평한 물음을, 게다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진다.
"군대 가면 배운다? 비가 막 억수같이 떨어져도, 비를 피하면서 걷는 기술 말야. 정말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비가 내리는데 비를 피하면서 걸어."
그렇게 말하는 새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정말로 거짓말처럼, 그리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어깨까지 젖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너는 나를 지나가다 보이는 공중전화 부스로 나를 밀어 넣었다.
"자, 봐. 내가 보여줄게."
그렇게 말하더니 너는 저 비가 내리는 인도로 나가서 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공중전화 부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보면서 어쩌면 너는 나와는 다른 의미로 대단히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나의 진단이 무색하리만큼 더욱 놀랄만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갑자기 복싱 선수처럼 슉슉거리며 좌우로 스텝을 밟고,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흔들어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비를 피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쓸모없는 행동 같은 그런 행동. 그리고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일 때마다, 그쪽으로 내리는 모든 비를 다 처맞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나 멍청해 보여서, 너 젖는 것이 걱정스러우면서도, 나는 그냥 하염없이 깔깔 웃어 버렸다.
그렇게 푹 젖은 채로 너는 내가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봤어? 내가 비 다 피하는 거."
그 말이 더 멍청해서 나는 다시 도 웃으며 핀잔한다.
"뭘 다 피해. 하나같이 다 처맞고 젖어 버렸는걸."
"아냐. 나는 분명히 내 쪽으로 내리는 비는 다 피했어."
너는 말을 이었다.
"웃지 말고 들어봐. 나는 분명히 나한테 정통으로 내리는 비는 내가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피한 거야. 내가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리로 내리던 비는 내가 사라진 곳에 그대로 떨어졌으니깐."
네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래, 그쪽으로 내리는 비는 분명히 피했겠지. 하지만,
"그 옆으로 움직인 곳으로 떨어지는 비는 모두 다 정통으로 맞았잖아."
너는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비를 안 맞는 기술이 있다고는 안 했어. 비를 피하는 기술이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게 중요해? 결국 다 젖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손수건으로 네 얼굴을 닦았다. 그렇게 닦은 자리를 다시 또 네 머리를 타고 흐른 빗물이 메웠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본다. 너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지."
"그럼 비를 안 맞는 법은 없어?"
나는 왠지 조급하게 그렇게 물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망쳐도, 하늘에서 마음이 쏟아졌고 나는 그 마음들을 정통으로 맞았다. 어디로 가든 도망갈 곳은 없었고, 내가 어딜 가든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말야, 그냥 너처럼 정통으로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비를 안 맞는 법은 있지."
너는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뭔데?"
"너 우산 챙겨왔다며."
"그랬지."
"그럼 우산을 써. 바보야."
그렇게 말하면서 너는 웃었다.
"아프면 약, 먹는 거고."
비가 내렸고 또 너무나 많이 내렸고, 너는 푹 젖었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았다. 푹 젖은 네가 그렇게 말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너는 네를 향해 쏟아지는 모든 비를 피했고, 피한 곳으로 쏟아지는 모든 비를 맞았다. 비를 피하는 기술과 비를 맞지 않는 기술. 그것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이상하게 그게 안심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그 공중전화 부스 안에 함께 있었고, 그러나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짧게만 느껴지던 날이었다. 젖은 콘크리트 냄새와, 네 젖은 향수 냄새. 통통거리며 부스를 두드리던 빗소리. 그 모든 것들이 쏟아지는 비 내리던 그 순간들을 그저 찰나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내리치던 햇살. 다시 울어대던 매미소리와 같은 것들. 젖은 바닥이 볕과 만나 반짝이며 증발하는 그 뜨거운 습기와 같은 것들.
우리는 그날 한 방울의 비도 더는 맞지 않았다.
-타인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