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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 강사 작가 Jan 20. 2023

호두가 오기까지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듯 농삿일에도 노동량 보존 법칙이 있어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사과 농사는 전지 작업, 수분, 적과로 농사 초반에 힘든 일이 몰려 있지만 가시가 없는 가지에 굵직한 사과를 따는 일은 블루베리나 딸기처럼 표면이 무른 과일 따기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굵은 본가지에서 새로난 가지만 몽땅 잘라주면 전지 작업이 끝나는 대추농사는 딸 때가 힘들다. 바늘보다 몇 배는 날카로운 대추나무 가시에 찔리지 않고 대추를 딸 수는 없다. 어느 담담한 의사가 침을 근육에 무심하게 밀어넣듯 대추를 따다보면 어느새 가시가 쑥하고 들어와 있다. 침은 빼고나면 통증이라도 없지 한번 찔린 대추나무 가시는 독감 주사 바늘처럼 통증이 오래 간다. 호두 농사에도 질량보존의 법칙은 적용된다.


호두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복숭아 모양의 과일이라고 호도였다가 발음하기 편하게 호두가 되었다. 자두 역시 자도에서 발음 상 이름이 바뀐 같은 경우다. 호두는 호두과자에 얌전히 들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만나기 쉽지만 그렇게 먹기 좋은 상태가 되기까지 과정이 만만치 않다. 


초록 껍질에 둘러 쌓인 모습


10월이 되면 호두 나무에서 초록색 껍질에 쌓여 있는 호두 열매를 수확한다. 다른 과일은 과육이 다칠새라 조심스럽게 따서 바구니에 담지만 단단한 껍질속에 있는 씨앗을 먹는 호두는 긴 장대로 털어서 바닥에 떨어 뜨려도 상관없다. 초록 과육은 어차피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상처나고 부서지면 더 좋은 일이다. 호두 수확에서 가장 편한 노동이다. 편함은 딱 여기까지, 노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그 다음부터는 힘든 작업이 이어진다. 우선 장대에 맞아 여기 저기 떨어진 호두를 주워야 한다. 줍다가 다른 사람이 턴 호두에 맞을 수도 있다. 10월은 아직 풀이 무성히 자라 있을 시기라 풀 사이에 숨어 있는 호두를 찾는 수고도 해야 한다. 


털고 줍고 해서 모은 호두는 초록 껍질을 벗기기 위해 집으로 가져와서 단단한 돌이나 시멘트 바닥에 내려친다. 겉껍질을 빨리 제거하지 않고 두면 검정물이 들거나 표면에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초록껍질을 다 제거한 호두는 물에 씻어 햇볕에 말린다. 이 과정이 끝났을 때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옅은 갈색의 딱딱한 껍질을 가진 호두가 된다. 

호두가 입에 들어 오기 위해서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망치로 딱딱한 껍질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때 힘조절을 잘못하면 알맹이가 바스라지므로 껍질만 깨지게 힘을 주어 금이 가게 한 다음 손으로 까주어야 한다. 호두하면 보통 이 작업을 생각하곤 먹기 어려운 과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충북 보은 처갓집에 고추 심던 땅에 어느해인가 작은 호두 나무가 열 그루 남짓 심어져 있었다. 수확하려면 몇 년은 키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지난 추석에 다니러 가니 호두를 따야 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그렇게 자랐나 싶다가도 명절에 다니러 와서 일을 해야 하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호두밭에 갔다. 갔더니 저마다 대나무 장대를 들고 있었다. '장모님 의병 나가는 거 같아요' 농담을 던지자 장대로 나뭇가지를 때리라고 하셨다. 정확하게 호두가 있는 곳을 내려쳐야 한다거나 호두에 상처를 주면 안된다거나 하는 어려운 주문없이 그냥 내려 치라는 것이었다. 호두는 생각보다 잘 떨어졌다. 열그루 나무를 다 털고 박스에 주워 모으고 나니 저녁이 되어 그 다음 작업은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호두를 잊고 살다가 11월말 김장하러 처갓집에 다니러 가니 옅은 갈색의 뽀얀 호두를 한 봉지 주시면서 까서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이게 지난 추석에 분명 초록 껍질인 채로 남겨두고 간 것인데 어느새 겉껍질이 제거되고 세척되고 잘 마른 상태가 된 것임을 알았다. 호두의 수확과정을 모른다면 가져가서 까먹는 일도 번거롭다 생각하겠지만 알고 있으니 이건 바로 입에 넣어 주시는거나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세상 어디에 쉬운일이 있을까. 무엇이든 완성된 모습이라면 노동량 보존법칙이 작용해 그 속에는 누군가의 애쓴 흔적이 고스란이 담겨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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