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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Dec 29. 2023

데자뷔

첫 번째 위기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부동산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존 임차인이 아직 기한이 남은 상태라 우리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아주 잠깐 대강만 상가 내부를 훑어보고 온 상태였다. 다들 어려운 시기에 공사비용이 부담된다고 하니 그럼 우리가 맡아서 최대한 합리적인 선에서 한 번 견적을 고려해 보겠다고 이야기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저녁을 먹는데 건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당장 얼마에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느냐고 답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부가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히 본 것도 아니고 계약서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고 임차인이 짐을 뺀 것도 아닌데. 예정된 날짜도 많이 남아있고 지금 당장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옆에서 통화를 듣던 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겪어본 상황인데. 앞선 경험으로 학습된 위험감지 센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다시 만나서 함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전화에 문자가 이어졌다. 부동산에서 뵈었을 때도 성격이 많이 급하신가 보다 여기고는 넘겼는데 의식 한 구석에서는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건물 명의는 아내분 명의로 되어 있어서 주 후반에 계약서에 사인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건물주는 다음 날 또 당장 만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일부러 오후 시간을 내어 상가 건물에서 만났다. 밤 사이에 도면까지 그려서 보내온 건물주는 가능하면 우리의 보증금 내에서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막상 들어가 보니 예상보다 내부 상태가 더 심각했다. 맨 처음 식당으로 쓰다가 몰딩이나 문틀, 가벽을 그대로 남겨놓은 상태에서 현재는 수족관으로 쓰고 있었다. 지하인 데다가 환기를 안 시키고 대형 수조들로 차 있다 보니 매우 습해서 천장에 곰팡이도 심했다. 세 칸 중 우리가 계약하기로 한 자리는 식당을 운영할 때 바닥을 높여서 방처럼 사용하던 곳으로 그것까지 포함하면 공사가 너무 커질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럼 비용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바닥은 가능한 그대로 살려서 쓰기로 하고, 최소한의 철거와 우리가 사용할 공간의 전기만 복구하는 것까지 해서 어떻게든 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 후로도 수시로 전화와 문자가 이어졌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을 못할 정도였다. 그 짧은 며칠 사이에 계속 말이 바뀌었다. 처음 얘기했던 그 비용 안에 다른 것들을 끼워넣기 시작했다. 임차인이 남겨놓고 가는 가구나 집기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대신 좀 처리를 해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몇십만 원 더 줄 테니 상가 세 칸의 유리문 전체를 가리고 있는 시트지를 우리더러 떼어달라는 둥 남겨진 쓰레기를 좀 치워달라는 둥 전기분전반을 나머지 두 칸까지 그 비용 안에서 복구를 해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건 아니지 싶었다. 이미 처음에 얘기했던 기본 철거와 전기공사, 천장 조명 공사만 해도 차고 넘쳤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쓸 그 한 칸만 감당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돈도 안 되는 일에 남이 할 고생까지 대신해 가며 우리가 감당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떠안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아쉬울 것도 없다. 처음에는 분명 서로 돕고 편의를 봐주는 선의에서 시작을 했는데 어느 순간 선을 넘고 있었다. 심지어는 반대편 건너에 있는 상가 두 칸까지 같이 하면 더 효율적이고 비용이 절감되지 않겠느냐며 단돈 이삼백만 더 얹어서 그것까지 또 지금 당장? 아니, 우리가 들어가기로 한 상가보다 이걸 먼저 해달라고까지 요구해 왔다. 사진으로 보니 온갖 인테리어와 칸막이로 가득 차 있기까지 했다. 부동산에 물어보니 그 상가 역시 아직 계약이 된 것도 아니고 문의만 겨우 한두 번 왔을 뿐이라고 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평일 한낮에 또 연락이 왔다. 아직 날짜가 남았는데 임차인이 짐을 다 빼서 나갔다는 것이다. 건물주의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전기 기술자와 내부 상태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연휴에까지 시간을 내어 방문을 했다. 그런데 불이 훤히 켜져 있고 생각보다 남겨진 짐과 쓰레기가 너무나 많았다. 짐 다 빼서 나간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다녀간 뒤로 임차인에게서 항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직 짐을 다 빼지도 않았는데 왜 와서 손을 대고 조명까지 내리고 갔느냐고 따졌다는 것이다. 우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건물주 본인이 그렇게 얘기해서 우리는 그 말을 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역시나 위험감지 센서가 맞았다.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호의에서 호구가 되는 건 한 순간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앞에서 말했던 갑의 의식을 불러오자. 우리 이제는 그 시행착오를 또 반복하지는 말자. 우리는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계약서에 도장도 찍고 계약금까지 걸었는데 이러다 아예 계약을 원상 복구해야 하는 건 아닌지, 열심히 기록한 이 글들도 말짱 다 도루묵이 되는 건 아닌지 심히 괴로웠다?


그러다 순간 이 상황이 너무나 웃겼다. 이게 우리가 이렇게 시달릴 일이었나? 우리는 그냥 깔끔하게 비어있는 상가에 약속된 날짜에 잔금만 치르고 입주만 하면 될 일이었다. 보증금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일을 힘들게 굳이 맡지 않아도 다른 할 일은 계속 있었다. 오히려 이 일을 맡으면 손도 빌려야 하고 기껏 해오던 일의 흐름을 놓치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그 일에 엮여서 이렇게 계속 시달리고 끌려다닐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가 여기에 손을 대면 입주해서도 이 상황이 계속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우리는 며칠을 고심 끝에 이 공사를 못 맡겠다고 전달했다. 가게 계약도 없던 일로 할까도 생각했지만, 부동산과 이야기도 나누고 도의적으로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예정대로 정해진 날짜에 잔금은 치르기로 했다. 플랜 B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 가격과 이 입지가 결코 흔한 기회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의사를 전달하고 또 한참을 통화한 후 공사에 대해서는 더는 얘기하지 않고 건물주가 알아서 하기로 하고 일단락 지었다. 어차피 할 공사는 하는 김에 제값을 주고 제대로 하는 것이 건물주도 더 나을 것이다.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을 때 복심이나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너무 생각이 많고 급한 성격에 떠오르는 그 생각들을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건물주 마음에 모래주머니를 열 개쯤 매달아 드리고 싶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인생의 묘미는 반전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간다. 엄청 멀리 온 것 같지만 기존 임차인의 기한은 올해 말일까지로 여전히 남아있다. 뭔가 숨차게 소란스러운 난리부르스를 거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건물주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일 뿐 우리는 다시 중심을 잡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또 뭘 이렇게 이걸 구체적으로 다 쓰고 있는지.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데에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생기고 이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만, 우리처럼 시행착오 한 번만으로도 타격이 클 사람들에게는 거듭 신중하자고 말해주고 싶다. 알고 있는 일이라도 서두르지 말고 돌다리도 반드시 몇 번이고 두드려보고 건너기를. 일이 술술 풀리고 다 맞아떨어지는 것도 물론 좋지만, 한 번쯤 걸려 넘어지고 틀어지면 그 순간이 인상 깊게 남는다. 그러면 자만심을 내려놓고 다른 관점으로 되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냥 없던 일로 엎어버리는 것은 쉽겠지만, 갈등을 풀어나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학습되고 성장한다. 시작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심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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