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사다가 생각나서 하나 더 샀어요." 쪽지 먼저 천천히 자세히 꼭 읽고 온기충전하고 가셔요
우주의 알고리즘이 어찌나 힘이 센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마음을 먹으니 여기저기서 페인트 작업이 연이어 들어온다. 사수는 시트지 작업을 좀 더 연마해야겠다고 몇날며칠 유튜브 고수를 찾아 붙들고 있더니 이집저집에서 싱크대 심폐소생술을 요청해 온다. 실전이 곧 실습이고 실력이다.
보여지는 작업 20%를 위해 보이지 않는 작업이 80%다. 사수가 거침없이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앞서 밑작업을 해놓는 것이 조수의 몫이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기 위해 귀찮고 하기 싫은 과정을 견뎌야만 한다. 도화지를 준비하고, 지우개질을 열심히 한다든지 뭐 그런 일! 재봉틀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두 번은 재단과 다림질도 재미있게 시작한다. 그러다 조금 익숙해지면 슬슬 귀찮아진다. 비록 있는 줄도 모르고 지워지고 사라질 흔적이지만, 그렇다고 8할을 차지하는 그 밑작업을 건너뛰면 작품이 예쁘게 나오질 않는다. 마음껏 바늘과 실을 굴리지 못하고 중간중간 흐름이 끊기거나 번거로운 일이 더 자주 생긴다. 페인트칠도 물론이고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다. 지겨워지더라도 그만두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꾸준히 한결같이 기본을 지켜야 한다.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들이 못 보는 곳까지 시선을 두는 것이 바로 프로의 디테일!
마스킹테이프 보양작업 전과 후
아래쪽 루바작업이 들어가지 않는 곳은 빼먹지 말고 말끔하게 다 칠해요, 사수 님! 매의 눈을 가진 조수!
지우개질 열심히! 여섯 번 덧바름
싱크대 새로 한 거 아닙니다. 부분 수리한 겁니다.
당근 플랫폼으로 연락이 왔다. 싱크대 상부장이 내려앉았다고, 고칠 수 있겠느냐고. 몇 개월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단골이다. 사수는 한 번 해 보겠다고 한다. 사전 방문을 해서 진단을 내리고, 며칠에 걸쳐 자재를 구한 후 재방문을 했다. 의뢰는 남편분이 하셨었는데, 평일 낮에 방문하니 아내분이 계신다.
싱크대를 손보는 동안 시트지가 벗겨진 곳도 있고 많이 낡아 보였다. 코로나 때 집안에만 있으니 시간이 많아서 셀프로 직접 시트지 리폼도 하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다 감춰지진 않아 보였다. 싱크대 문짝을 달다가 한쪽에 나란히 붙여놓으신 쪽지까지 읽게 되었다. 아래층 이웃과 주고받으신 손편지였다. 글씨도 너무 단정한 데다가 서로가 어떤 이웃인지 고스란히 읽히는 너무나 친절하고 따듯한 필담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있으니 층간소음 문제로 아래층이 신경 쓰여 챙길 수도 있었겠지만,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 속에 주고받은 이야기가 층층이 쌓인 걸 보니 서로에게 참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나까지 마음이 참 흡족했다.
사수는 결국 또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싱크대를 살렸다. 작업을 마무리 짓고 주변에 다른 곳까지 손볼 곳은 없는지 살피는 사수를 보며 고객님께서 말씀하신다.
"아휴! 지난번에도 수전 갈고 나서 똑같이 여기저기 다 봐주시더니 안 보셔도 됩니다. 이번에도 너무 잘 고쳐주셔서, 또할 수 없이 5년쯤 더 써야겠네요."
할 수 없이? 아하! 같은 여자로서 무슨 말인지 단 번에 알아들어버렸다. 남편들은 모르는 기분이다. 내려앉은 김에 고이 보내드리고 싱크대를 새로 들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의뢰하신 남편분은 고칠 수 있으면 고쳐 쓰자고 우리를 부른 것이다.
"아이고, 저런! 남편분께 저희가 못 한다고 했어야 이참에 싱크대를 새로 바꾸시는 건데! 너무 짱짱하게 고쳐놔서 죄송해서 어떡해요."
이때다 싶어서 잊지 않고 사수에게 한바탕 잔소리도 퍼붓는다.
"거봐! 내가 예술하지 말랬죠. 좀 적당히 하라니까."
의뢰인께서 한참을 웃으신다. 쪽지에서 읽힌 그분의 성품처럼 엘리베이터 앞까지 짐을 함께 들어다 주신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며 나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시트지도 낡았던데, 혹시라도 남편분께서 또 문의가 오시면 저희가 시트지는 절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최근 들어 우주의 알고리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다락방!
다락방은 어릴 적 나의 로망이었다. 지금까지도? 아파트 꼭대기층에 서비스 공간으로 다락방이 있는 곳들이 있다. 여러 다양한 집들을 방문하다 보니 어느 아파트에 다락방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방문한 의뢰인 댁도 탑층에 다락방과 개별 옥상까지 있었다. 내가 다락방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고 하니 선뜻 함께 올라가자며 구경을 시켜주셨다. 의뢰인은 정말 많이 여기저기 알아보고 공부하고 찾아보고 고심해서 지금의 집을 구했다고 하셨다. 그러니 얼마나 애착이 더 크실까.
탑층은 층고가 높은 만큼 겨울에는 확실히 좀 더 춥고, 여름 장마철에는 반드시 누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단열문제와 난방비도 고려해야 하고, 다락방 면적이 서비스 공간인지 아니면 난방이 깔려서 합법적 공간에 포함되는지에 따라서 관리비도 천지차이가 된다고 한다. 옥상이 있는 경우에는 옥상 관리를 아파트 관리실에서 해주느냐, 개인 세대가 해야 하느냐의 책임 소재가 정말 중요하다고도 알려 주셨다. 게다가 25층 이상은 이사하거나 새시를 교체할 때도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서 모두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락내리락하며 짐을 옮겨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알아두면 쓸데있는 아파트 잡학사전이다. 로망이 현실이 되는 데에 고려해야 할 정말 중요한, 자신이 공부하고 직접 경험한 꿀팁들을 스스럼없이 나눠주셨다. 다락방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이웃이라면 이사 오고 싶을 것 같다.
아파트 다락방?! 이제는 무릎도 아프고, 처음에야 몇 번 좋겠지만 다락방이 있다고 몇 번이나 올라가겠어. 로망은 로망으로 남겨두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