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이 아프다. 몇 년 사이에 시나브로 좁아지고 얇아지고 들러붙어서 이제는 쉬이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아니다. 어쩌면 이제 좀 솔직해질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참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은 마음 말이다.
한 달도 훨씬 전부터 주방 쪽 마루 부분보수 작업을 예약해 둔 집에 약속된 제 날짜 제시간에 방문을 했다. 아무리 부분보수라고 해도 마루는 철거작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소음이 발생한다. 그래서 사전에 미리 고지하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 한번 더 확인까지 거친 후 방문하는 길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세입자는 작업을 하면 주방을 못쓰지 않느냐며 그제야 설거지를 하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작업할 위치가 정확히 싱크대 앞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로 30분을 넘게 기다렸다. 작업을 시작도 안 했는데 왼쪽 허리 아래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올 조짐이 보인다. 세입자가 물러난 후 주방 전체에 보양비닐을 두르고 육중한 냉장고까지 옮겨 꼼꼼히 비닐옷을 입혀준다. 냉장고 밑도 작업을 해야 하는데 먼지가 얼마나 쌓여 있던지 우리 집에서도 잘 안 하는 청소를 여기 와서 해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철거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아랫집에는 알리셨느냐고 물으니 너무도 태평하게 안 했다고 답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커녕 집주인에게도 오늘의 작업 일정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소음과 먼지가 꽤나 발생할 것이라고, 아랫집에 양해를 구하는 게 좋겠다고 하고 또 한참을 기다렸다. 하루를 통으로 잡아도 오늘 안에 마치기 빠듯한데 아침 일찍 찾아간 게 무색하게도 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서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살림을 살고 있는 집에서 목공 작업을 하기란 여간 번거롭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라서 길어지기 일쑤다.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만 철거하고 보수하는 작업은 더더욱 까다롭다. 이음새를 파손 없이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철거하고 이어 붙여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마루를 걷어낸 바닥에 붙은 부스러기와 본드를 긁어내고 고르게 샌딩하는 작업 또한 공력이 많이 소모된다. 오전 10시가 넘어 시작한 작업은 저녁 7시가 넘어 겨우 끝이 났다. 늦어진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그 자리에서 때우며 작업하는 우리를 뻔히 보면서도 오며 가며 언제 끝나느냐고 자꾸 묻기만 하고, 그 와중에 가족끼리 저녁도 드셔가면서 건장하고 젊은 아들을 두고 냉장고까지 마저 제자리에 원상복구해달라고 사수를 다시 부른다. 아무래도 조수의 인내심은 이미 오래전에 끊어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온 김에 현관문 말발굽까지 교체해 달라고 한다. 마루작업은 그래도 어쨌든 한 달 전이라도 집주인과 얘기된 사항이었다고 하지만, 이건 전혀 사전에 얘기된 사항이 아니다. 세입자는 또 너무나 태연하게 그 또한 집주인에게 알아서 받으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나마 정말 최소한으로만 요구한 거라고 꼭 말해달라고까지 한다. 그 최소한은 우리가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작업하러 오기 전에 정말 최소한 그 정도는 미리 해놔 주셨더라면...
그걸 다 웃으며 받아넘기다니 사수는 참 비위도 좋다. 간이랑 쓸개랑 이참에 비위까지 집 냉장고에 넣어두고 왔나? 아무래도 사수의 정체는 별주부가 아닌가 싶다. 조수는 더 이상 말 한마디 할 힘도 기분도 남아있지 않아서 먼저 나와 쓰레기와 장비들을 차에 옮겨 싣기로 한다. 다행히 집주인은 작업사진을 확인하고 에누리 없이 모두 입금을 해주었다. 이런 세입자를 둔 집주인도 참 고달프겠다 싶은데, 통화 끝에 사수에게 한 마디 덧붙이신다. 자신의 연락처를 잘 저장해놔 달라고. 또 필요하게 될 것 같다고.
이번엔 단골 부동산 사장님의 요청으로 빌라 3층에 싱크대 필름 보수작업과 몇 가지 추가로 소소한 작업이 잡혀 있었다. 아뿔싸! 엘리베이터가 없다. 안 그래도 요즘 여기저기 아파트들도 노후교체 시기인지 엘리베이터가 공사 중인 곳이 많다. 사수는 그 육중한 캐리어 공구가방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무릎연골을 갈아 넣는 중이다. 우선은 꼭 필요한 짐만 최소한으로 챙겨 올라가고, 오늘만큼은 조수도 인내심에 무통주사를 놓고 좀 더 손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어라? 아직 빈 집인데, 세입자가 먼저 와서 우리가 작업하는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느낌이 어째 좀 쎄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수가 뭐 좀 할만하면 세입자가 자꾸 불러서 여기도 좀 해달라고 하고, 하는 김에 저기도 좀 해달라고 한다. 부동산 사장님과 사전 약속된 작업 외에 그 자리에서 추가되는 작업들이 한참 더 늘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알아서 임대인에게 요청해서 추가로 더 받으라니! 이러니 인내심이 안 아프고 배기겠는가. 이번에도 다행히 부동산 사장님이 책임을 지고 나서준 덕분에 사수가 말을 길게 덧붙이지 않아도 되었다. 낡은 집 고치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든지 이해하지만, 아니 무슨 자기네들 지갑을 맡겨놓은 것도 아닌데 최소한 집주인에게 먼저 말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척하면서 자신이 직접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은 싫어서 그 역할과 책임을 사수에게 미루는 것도 참 뻔뻔하다 싶었다. 이것은 신종 을질인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동안의 경험치로 오히려 물리적 작업 시간에 대한 지구력은 늘었다. 이런 어이없고 얼토당토않는 일들로 인한 인내심 고갈만 아니라면 훨씬 더 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을 텐데 아쉽고 아까울 따름이다. 어깨 허리며 손가락 마디마디 쑤시는 거야 파스라도 붙이면 될 일인데, 마음에는 왜 좀처럼 굳은살이 안 생기는지 매번 참 새삼스럽고 새살스럽게 쓸리고 아리고 질리고 저린다. 집주인은 갑이 아니다. 세입자도 을이 아니다. 그리고, 사수는 봉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 대 사람일 뿐이다. 무엇보다, 함부로 해도 되는 당연한 호의와 친절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