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그 소란한 마음
사수는 여전히 종종 대나무숲 콜센터가 된다. 누군가의 외로움도 들어주고, 누군가의 고충도 귀 기울여주고, 온갖 각양각색의 욕망 또한 받아 안아 묻어준다. 아무래도 사수는 인간 용광로인가?
또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는 괄괄한 통화 소리에 우리가 수리해 준 뭔가가 잘못되어 클레임을 거는 전화인가 싶어 놀란 마음에 걱정이 앞섰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우리가 환풍기도 고쳐주고, 문도 고쳐주고 이것저것 손봐줬던 단골 새댁이었다.
"아무래도 이사를 가야 할까요?"
아니, 이걸 왜 사수에게 묻지? '수전을 갈아야 할까요?'라든지 '변기를 바꿔야 할까요?'라든지 집수리 영역 안에서의 물음이라면 아는 한 얼마든지 답을 해줄 테지만,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집을 통째로 바꿔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사수에게 묻다니! 너무 믿어서인가, 너무 편해서인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층간소음 문제로 윗집과 아랫집이 서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들 둘을 키우는데, 너무 시끄럽다고 아랫집에서 한 번 올라와 한 마디를 하고 가니 그게 속상해서 쫓아내려 가 또 한바탕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또 윗집도 시끄러워 본인도 층간소음에 시달려 보니 이래저래 이사를 가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 1층에 매물이 나와서 보고 왔다며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사수에게 토로하고 있다.
상가건물에서 살 때 층간소음이며 칸간소음이며 얼마나 괴로운지 두통에 멀미가 날 지경까지 직접 시달려본 적이 있는 조수 역시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윗집 오줌 누는 소리에서부터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발 뒤꿈치 쿵쿵거리는 소리까지 따닥따닥 붙어 층층이 쌓고 사는 아파트는 더욱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집 역시 아침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휴일 아침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풍금인지 오르간인지 연주소리에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집만 들리는 것은 아닐 텐데,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한 번쯤 생각했다가 그 정도로 듣기 괴로운 소리는 아니어서 그러려니 하고 있다.
그나저나 한창 쑥쑥 자라는 아이들은 얼마나 뛰고 싶을까? 이제 막 걷고 뛰고 달리고 솟아오르기 시작한 아이들인데, 매번 그걸 자제시켜야 하는 엄마 마음도 몹시 괴로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사를 갈지 말지를 묻는다고 가세요, 마세요 덜컥 답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딱히 우리의 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털어놓고 쏟아낼 곳이, 그것을 받아줄 곳이 필요한 것뿐이다. 답은 이미 자신 안에 있을 것이고, 마음은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섭도록 자라고 있을 테니. 아마도 이사를 간다고 해도 그 비슷한 마음은 곧 또 금세 싹을 틔우고 자랄 것이다. 조수 역시 그래봐서 알 것 같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집을 바꿔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게다가 이 익숙한 느낌? 데자뷔다. 괜히 섣불리 답했다가 나중에 또 무슨 원망과 탓을 들을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는 정말 공자의 지혜가 필요하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모면하는 묘법 말이다. 예를 들면, "아! 저런.", "어머, 어떡해.", "아이고, 어째!", "오, 그랬구나."만 있어도 왠지 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말이다. 비법 대방출!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새댁은 또 막상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환풍기며 실리콘이며 이것저것 돈 들인 것이 아깝다고, 이사를 가게 되면 환풍기도 뜯어가겠다고 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냄새를 견딜 수 없어 환풍기를 바꿔달래서 바꿔줬더니 이제는 그 소리가 너무 심해 견딜 수 없다고 연락이 왔었다. 사수가 다른 새 제품으로 바꿔도 줘보고, 본사 A/S도 불러서 확인해 주고, 결국엔 이도 저도 답이 없어 돈으로 물어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사수는 또 그 모든 이야기까지 다 들어주고 있다. 그 와중에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덩달아 조수는 또 왜 그걸 다 기억해?), 키우는 고양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안부를 물으니 그새 새로 또 한 마리를 들여왔다며 사진을 주고받고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통화를 끊는다. 꽤 혈통 있다는 고양이의 값과 우리가 물어준 환풍기의 값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서 비교되는 건 조수도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장사를 해야하는 사람이라지만, 참 속도 좋다. 매번 그걸 어떻게 다 받아주느냐고 묻는 조수에게 사수가 답한다.
"편해서 그런 거야."
아니, 바로 옆집 아줌마도 아니고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사람 마음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난해한 킬러문항이다. 과연 그 선이 어디까지일까? 편하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라는 핑계로 합리화하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벌거벗은 듯 다 드러내고 휘두르는 모습 앞에 왜 내가 더 민망해지는 것일까? 그렇게 누군가에게 있는 대로 부리고 쏟아내거나 싸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겹겹이 층층이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정작 자신의 그 소란한 마음이 아닐까? 아마도 내가 민망해지는 까닭은 나 역시 그런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추고 있던 자신을 들킨 것 같아서. 넘치는 이 욕망을 흘리고 다니지 말아야지, 부디 잘 개켜서 간수해야겠다고 조수는 거듭 다짐한다.
https://brunch.co.kr/@shiningtree/538
오랜만에 1400짜리 욕실장 두 개를 한 번에 설치하는 작업이 잡혔다. 마음의 각오가 필요한데 예전만큼 팔에 힘이 안 들어간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일까? 아주 미세한 그 작은 턱이 없어서인지 초능력 게이지가 잘 안 차오른다. 조수도 때로는 손이 필요하다. 유난히 턱이 부실한 조수를 위해 사수가 안성맞춤 전용 턱을 만들어 주었다.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즉석에서 쓱쓱 만들어 쓰는 인간, 호모 파베르 소환이다.
있던 나무를 잘라 높이에 맞는 보조받침대를 만들고, 핸드리프트를 끼워 미세한 높낮이를 맞추기로 했다. 처음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한 번 만들어 놓으니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해서 힘이 된다. 진작 만들어 주지?!
https://brunch.co.kr/@shiningtree/206
무사히 깔끔하게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니, 이번 달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 얼굴이 환해진다. 새 욕실이 된 것 같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조수 역시 뿌듯하다. 초능력 게이지가 좀 회복되는 듯하다. 아직 살림을 다 들여놓지도 않은 신혼집 거실 한가운데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작고 여린 초록 새싹들이 자라고 있다. 상추와 바질을 키워보고 있는데, 햇볕이 부족해 웃자랐다며 식물등을 사야겠다고 한다. 아직 젊은 친구가 뭔가를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푸르고 싱그럽다. 그리고는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이라며 부엌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홍시를 싸준다. 친정아버지께서 퇴직 후 손수 지은 농사라며 고구마까지! 키우는 걸 누굴 닮아 좋아하는가 했더니 부전여전인가? 따님에게 주려고 얼마나 어여쁜 것만 고르고 골라 담으셨는지 토실토실 동글동글 사랑을 닮았다. 이걸 이대로 다 그냥 받아오기엔 염치가 없다. 사수님, 알죠?
작업을 하다 보니 의외로 같은 말이 자주 반복된다.
"손 조심해요!"
"칼 조심해요!"
"머리 조심해요!"
"사다리 조심해요!"
너무 기본적이고 당연한 말들이다. 흔하고 뻔한 말들이다. 눈앞에서 직접 보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하고 또 하는 말이다. 익숙해지지 말라고, 당연해지지 말라고. 아무리 능숙하고 노련해도, 편하다고 마음 놓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