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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실화입니까?

인간의 기본값

by 햇살나무 여운
정호승 <오죽하면>


이 날따라 모든 것이 유난히 순조로웠다. 이사 들어올 빈 집에 타일보수 작업과 욕실 수납장과 변기, 세면대 교체작업을 맡았다. 자재와 장비도 무리 없이 준비되었고, 볕도 좋고 바람도 적당해서 작업하기도 무척 좋았다.


타일작업은 마무리 실리콘까지 결과물이 아름답게 나와서 몹시 흡족했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덤벼야 했던 욕실 수납장도 기존 브래킷이 튼튼하고 잘 맞는 데다가 벽면 타일이 전체적으로 빈틈없이 메꿔져 있어서 뜻밖에도 크게 힘들일 필요 없이 식은 죽 먹기로 끝났다.


며칠 동안 아무 일이 없어 고요하면 이제는 그 평화가 오히려 불안하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또 무슨 일이 휘몰아치려고?" 하는 불안이 엄습한다. 평안과 축복은 아무래도 내 몫이 아닌가 싶은 일들을 연이어 겪고 나면 생기는 학습효과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변기도 뜯었더니 별다른 변수 없이 할만했고, 세면대도 기존 브래킷의 높이와 간격이 아주 잘 맞아서 콘크리트벽을 새로 또 뚫지 않아도 되었다. 뭔가 중요한 게 빠졌나? 왜 이렇게 무난하고 순조롭지? 사수가 그밖에 남은 여러 자질구레한 작업들을 마무리지을 동안 조수는 쓰레기와 장비들을 갈무리했다.


사수가 변기에 마지막 실리콘으로 화룡점정을 찍으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변기 둘레에 실리콘을 쏴놓고 마르기 전에 어서 헤라질을 해야 하는 찰나였는데 하필! 작업 중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멀찌감치에서 들어도 태도에서부터 일방적이고 갑질적인 톤으로 시작해 한참을 제 할 말만 하다가 좀 더 구체적인 자초지종을 묻는 사수에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며 "됐다고!" 짜증 가득히 소리를 지르며 끊어졌다. 그것이 전조였을까? 아니, 전부였으면 좋았을 텐데.


바로 전날에도 밤 10시가 넘어 전화가 걸려왔었다. 이것저것 자신이 인터넷에서 검색한 온갖 정보들을 죄다 나열하며 한참을 물을 대로 다 물어보더니 형식적으로라도 고맙다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통화는 끊겼다. 챗GPT를 만든 CEO가 그랬다던가? AI에게 "고마워." 하지 말라고. 그걸 처리하는 데에 에너지가 더 소모된다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벌써부터 AI 챗GPT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우리가 무슨 AI 챗봇도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고 감정이 있는 똑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무례하고 일방적인 태도를 너무 많이 보고 겪어서 이제는 그걸 당연한 기본값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실리콘 작업을 마저 끝내고 순간 불쾌했던 기분은 먼지 털듯 훅훅 다 털어버리고 마지막으로 작업현장 전체를 한번 더 돌아본 후 철거한 변기와 세면대를 카트에 싣고 물러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잠깐,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뜯어낸 투 피스 변기 중 아래쪽 본체를 먼저 카트 위에 싣고 바로 그 위에 위쪽 물통을 눕혀서 얹는데, 엎어진 변기 물통 뒤편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 얼핏 봤을 때는 도기가 깨지지 않게 조심히 다루라고 적어놓은 주의사항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껏 한 번도, 그것도 변기 뒷면에 그런 스티커가 붙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뭐지?"하고 가까이 들여다보는 순간, 그것을 읽고야 말았다. 아...... 어떡해. 새겨지고 저며진 그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 내 눈과 마음으로 읽어버리고 말았다. 긁혀버리고 말았다.


사수와 조수는 지금껏 수많은 집들을 우리 두 손 두 발로 직접 거둬내고, 긁어내고, 쓸어내고, 씻어내고, 닦아내며 다녔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각양각색의 마음들을 마주했다. 쉽지 않은 작업들도 많았고, 위험천만하고 두려웠던 순간도 많았다.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일의 특성상 곱고 어여쁜 것보다는 추저분하고 낡고 얼룩진 자국들을 더 많이 발견하고 목격해 왔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참으로 그런 것이라고, 모르지 않아서 이해도 되고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도 품었다. 우리를 만나고 나서 사람이든 공간이든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맑아지면 그 또한 뿌듯하고 기뻤다. 힘들어도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진심으로 감사하기도 했다. 비록 먼지 같은 존재일지라도 광활한 우주 어느 한 구석 푸르게 빛나는 별 속에 별이 우리 손길이 닿는 순간 반짝하고 정화되고 빛이 밝아지는구나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무방비 상태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동안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품고 있는 속마음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 애써 외면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게 되다니! 그걸 발견하는 순간 무섭다 못해 몹시도 슬프고 섬뜩했다. 왜 그랬을까? 처음엔 보고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변기에 적힌 글귀를 굳이 다시 읽기까지 했다.



"○○○ 막내딸 교통사고로 평생 장애 앓다가 뒤져라."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었다. 설정이나 연출도 아니었다. 정말 내 눈앞에 현실이고 실화였다.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못 볼 꼴을 참 많이도 본다. 이토록 주도면밀하고 구체적으로 새겨진 저주를 마주하게 되다니! 모르지 않았으면서 새삼스레 아직도 놀랄 것이 남았었나 싶기도 하다. 요즘 길거리에 흔히 마주치는 현수막들처럼 대놓고 노골적인 혐오나 욕설보다도 아마도 더 놀란 까닭은 이곳이 너무도 가깝고 흔한 우리 이웃의 여느 평범한 가정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까?게다가 가장 은밀하고도 더러운 변기 뒤에 보이지 않게 숨겨둘 만큼,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치밀하고도 정성스럽게 준비했을까 싶은 그 마음을 하필 의도치 않게 내가 목격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그 글씨를 새기는 동안 스스로 자신이 무섭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원한과 저주를 짙게 품게 되었을까? 이 마음은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 것일까?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이 직접 붙이고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볼 때마다 상대를 떠올리며 되뇌었을까? 아니면 저주문을 쓴 사람이 어느 날 이 집에 찾아와 당사자가 매일 앉는 변기에 들키지 않게 조마조마하며 몰래 붙였을까? 그렇게 매일 지옥을 떠올리고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그 막내딸은 또 무슨 죄인가?


아...... 이미 봐버려서 뇌리에서 쉽사리 떨쳐지지가 않았다. 인간은 정말 도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진정 사람을 사람 아닌 것으로 여기고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이 마음을 어디 가서 어떻게 씻어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느슨해질 틈 없이 일이 연이어 계속 있었다. 무인카페가 있는 1층 상가건물에 하수구가 막혔다고 한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하수구가 더 낫다. 열심히 뚫자! 뚫고 뚫고 또 뚫자! 그렇게 오래도록 꽉 막히고 맺힌 것이 하수구인지 우리네 인간의 마음인지, 우리가 뚫고 뚫고 뚫어서 흘려보낸 것이 오래 묵은 오물인지 원한인지! 밤은 이미 깊었고, 깊은 가을 달님은 남의 속도 모르고 밝기만 하다.




오죽하면 미워하면서도 사랑했겠니

오죽하면 봄에 핀 꽃들이 얼어 죽었겠니

발을 밟은 사람은
발을 밟힌 사람의 아픔을 모르고
칼로 찌른 사람은
칼에 찔린 사람의 상처를 모른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천국보다 지옥을 엿보는 것
우물가에서 목말라 죽는 것


- 정호승 <오죽하면> 중에서


p.s. 누군가의 지옥을 엿보고 온 그날, 무인카페 사장님의 친정어머님께서 큰따님과 함께 내내 가게를 지키시며 작업하느라 지저분해진 우리들의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덥석 잡고 고맙다고 다독여주셨습니다. 뭐라도 돕겠다며 따뜻한 차도 내어주시고, 고생하는데 어서 먹고 하라며 김밥도 사다주시고, 늦은 시간까지 힘드셨을 텐데 자리를 지키며 곁을 내어주셨답니다. 스스럼없이 선뜻 잡아주시는 그 손이 참 따듯했습니다. 어머님은 미처 모르셨겠지만, 방금 한 사람의 마음을 구하셨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 손길 덕분에 절망이 희망이 되고, 그 하루는 어둠이 아니라 미소로 번졌습니다. 너무 큰 일을 보고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큰 일로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1도씨의 온기가 만년설을 녹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끝까지 사람다운 사람이기로 선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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