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거부터? 어려운 거부터?
사수가 한동안 좀비 영화를 몰아본다. 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좀 그러라고 내버려 둔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호랑이는 동굴이 필요하고, 잔인하고 지독한 일은 더 지독하고 고통스럽고 잔혹한 장면으로 덮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더! 더! 더!”에 중독되나 보다. 뱀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독을 지녔다. 반드시 해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좀비 영화 다음으로는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하다는 <나 혼자만 레벨업>이다. 셀프 레벨업은 사수의 주특기가 아닌가? 곁에서 얼핏 보니 악마를 사냥하는 헌터로 나오는 주인공은 대외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최하위 등급의 최약체로 시작한다. 그는 매 순간 주어지는 아주 사소한 퀘스트들을 꾸준히 해낸다. 예를 들면, 팔 굽혀 펴기 몇 개부터 시작해서 5분간 도망쳐서 살아남기 등이다. 항상 다치거나 중상을 입거나 심할 때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다. 그런데도 회피하지 않고 꾸역꾸역 다 해낸다. 수많은 퀘스트와 시뮬레이션을 통과하는 동안, 모두가 무시하고 만만히 보던 그는 어느 순간 측정 불가한 최고 등급이 되어 있다. 그동안 자신의 내공을 숨기고 홀로 꾸준히 성장을 해 온 것이다. 아주 미약하고 사소해 보이는 크고 작은 퀘스트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런데 그 성장의 기회 앞에서 하느냐 마느냐,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선택이 다를 뿐이다.
며칠의 동굴모드를 끝내고 나온 사수는 기지개를 켜더니 곧바로 몸풀기에 돌입한다. 아침에 나가서 뛰기로 한 것이다. 사람이 없는 구석지고 외진, 홀로 고독을 삼킬만한 곳을 찾아서. 그렇다면 조수도 따라 나가서 그 쉬워 보이는 ‘팔 굽혀 펴기 몇 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다. 아니다, 일단 ‘따라 나가기’부터 시작이다. 저항과 관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불 밖을 벗어나기부터 쉽지 않은 퀘스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끌고 나가달라고 사수에게 미리 당부해 둔다. 일단 끌려 나가든 따라 나가든 그다음은 10분이 되기도 하고 30분이 되기도 한다. 물론 나가기에 실패도 했다가 다시 나가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한다. 풀만 보고 꽃만 보고 오기도 하고, 새를 쫓으며 해찰만 부리고 오기도 한다. 맨손체조만 하다가 뛰는 시늉만 하다가 오기도 하고, 줄넘기 100개를 넘기기도 하고 가끔 기공을 따라 하기도 한다. 누가 봐도 최고허약체인 조수는 조금만 뛰어도 벌써 어지럽고 메스껍다. (도대체 일은 어떻게 하나 몰라?)
어느 구석 하나 일관성이나 완벽이라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조수에게는 일이나 약속이 아닌 목적으로, 심지어 세수도 안 하고 밖에 ‘일단 나가기’부터가 위대한 변화이자 작은 성공이다. 이 얼마나 타율적인 인간인가? 이 작은 성공들이 쌓이고 익숙해질 때까지 꾸준히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 조수의 하찮은 목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더니, 이제 겨우 3초 정도 뛰는 조수 옆에서 줄넘기로 묘기하고 있는 사수 정말 얄밉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것도 셀프 레벨업에 꽤 좋은 동기부여가 된다.
현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내야 할 때 쉬운 거부터? 어려운 거부터? 당연히 쉬운 거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더 높은 완벽을 요하는 고난도 작업부터 손댔다가 이도 저도 못 하고 시간과 체력 모두를 허비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전등 교체 작업과 변기 교체 작업이 있다면 전등부터 덤빈다. 힘들이지 않고 깔끔하게 끝낼 수도 있고 둘이서 같이 하면 시간도 3분의 1로 단축할 수 있다. 시험문제를 풀 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부담 없이 쉽고 가볍게 끝낼 수 있는 것부터 해서 워밍업도 되고 마음의 이완을 이루고 나면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이 절로 샘솟는다. 심리적 저항이 낮아진다. - 시험공부 앞두고 갑자기 책상정리가 하고 싶어지는 마음과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딴짓만 계속하는 듯 보여도 좀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그 또한 긴장을 완화하고 마음의 저항을 낮추느라 나름대로 애쓰는 중이다. - 물론 현장과 작업의 다양성에 따라서 중간중간 병행하거나 섞어서 해야 하는 경우에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일머리도 있어야 한다. 시멘트나 퍼티 작업은 양생하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
새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아침 산책 루틴은 아직 너무 극미해서 운동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확실히 좋아진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중독에는 자연만큼 탁월하고 경이로운 해독제가 없다. 해독의 시간을 거쳐 제법 빠르게 회복하는 사수와 조수는 다음 셀프 레벨업을 향해 또 한 걸음 나아간다. 부딪쳐오는 세상이 우릴 깨트리든 우리가 스스로를 깨트리든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강해질 뿐이다. 깨지고 거듭나고! 그게 지금껏 우리가 살아남은 방법이다. 그 하찮은 독을 매일 조금씩 꾸준히 복용하고, 고독으로 해독한다. 이독제독(以獨制毒)이다.
앞뒤 자르고 빨리감기해도 길다? ㅎㅎㅎ
그 나이에 대회라도 나가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