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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배신

어깨와 무릎

by 햇살나무 여운

한 달 정도 사라지는 시간을 가졌다. 길고 긴 추석 연휴에도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15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빠듯한 틈새에 2박 3일 짧은 여행도 다녀왔다. 그림도 보고 바다도 보고 친구도 보고 왔다. 그 사이 가을물이 짙어졌다.


늦은 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곧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1박 2일로 빠듯하게 잡힌 작업이 있어 다녀왔다. 이번에도 단골이 믿고 맡긴다며 부탁해 온 장거리 출장이었다. 사수는 한번 나갔다 하면 얄짤없이 12시간이다. 일찍부터 미리 약속된 작업이어서 조수 역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발했다.


이번 작업은 24평 아파트 페인트칠과 도배장판이었다. 새로 들어올 신혼부부 세입자를 위해 전체 몰딩과 문짝 4개를 새롭게 칠하고, 스위치와 콘센트도 갈아주고, 도배를 새로이 해주고, 장판은 상태가 심각한 작은방 한 칸만 하기로 했다. 1년 여동안 여러 가지 작업을 해주며 단골이 된 집주인은 잔금일에 부동산에도 들를 겸 왔다가 작업을 시작하는 우리를 보고 갔다. 작업하다가 추가로 손봐야 될 것이 있으면 사수가 알아서 잘해주고 나중에 청구하라는 말까지 당부하고 갔다.


도배와 장판은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 지역에 있는 업자와 협업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잡았다. 여기도 부부가 함께 나란히 하는 모양이다. 먼저 실측을 하러 온 아내분께서 점심은 드시고 하느냐며, 그 지역을 잘 모르는 우리에게 "자장면이라도 시켜드릴까요?"하고 말을 건네신다. 당근이나 숨고 플랫폼에 달리는 후기나 댓글에 울고 웃어야 하는 동병상련의 업자끼리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씀이 고마웠다.


오전 11시쯤 본격적으로 시작한 페인트 작업은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다음날 도배를 하기로 되어 있고, 세입자가 이사 들어오기로 한 날에 맞춰 작업기한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날짜가 부족하기도 했고, 장거리를 몇 번 더 오고 가는 것도 우리로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조수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몰딩을 맡았고, 사수는 커다란 문짝을 맡았다. 이번 작업을 위해 특별히 새로운 장비까지 들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우리 손을 거쳐 공간이 차츰 밝게 살아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재미있고 즐겁게 작업했다. 페인팅은 조수가 좋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존 상태가 워낙 노후되어 있어서 결과물이 말끔하게 나올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몇 번 덧칠을 해봐도 오래된 녹이나 곰팡이가 조금씩 올라왔다. 최선을 다했지만, 전체를 싹 다 새로 갈지 않는 한 우리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본작업보다도 더 공을 들인 건 역시나 밑작업과 사후처리였다. 24평 공간은 말 그대로 마스킹월드가 되었다. 보양 비닐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붙인다고 붙였는데도 워낙 작업 범위가 넓고 시간이 촉박해서 더 조심하며 세심하게 작업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부분보수가 아니라서 문짝은 붓으로 칠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스프레이건으로 분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페인트가 여기저기 사방팔방 안개비처럼 내려앉았다. 조심히 마스킹 테이프를 벗기고 보양 비닐을 걷어낸 후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손톱이 닳고 손가락 마디에 멍이 들 정도로 닦고 또 닦았다. 우리의 본업이 집수리인지 입주청소인지 순간 착각할 뻔했다. 그래도 우리가 사고 친 건 우리가 수습하고 가야 했다. 어쩐지 소소한 집수리가 점점 더 거거한 집수리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정작 진짜 사고는 그 다음 날 일어났다. 아니다, 이건 누군가의 의도와 의지가 개입되었으니 사건이다. 도배와 장판까지 마무리 짓고, 너무 낡아 벗겨지고 녹이 슨 욕실 문손잡이가 눈에 띄어 작업내용엔 없었지만 일부러 최대한 비슷한 걸 찾아다 교체까지 해주었다. 집주인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작업이 모두 완료된 사진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너무 비싸다고.


이제 와서 비싸다니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이 직접 하나하나 알아보기 어렵고 번거로우니 다 맡아서 알아서 잘해달라고 했고, 장거리임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믿고 맡기기 어려우니 특별히 부탁한다고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 달도 훨씬 전에 줬던 견적에서도 오케이 했었고, 이번 작업 시작하기 전에 다시 거듭 묻고 확인했을 때도 그대로 진행해도 좋다고까지 했는데... 지난번에도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 해결해 줘서 고맙다고, 게다가 바로 하루 전에는 추가로 손볼 것 있으면 보고 나중에 청구하라고까지 직접 말하고 가신 분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시는지 몹시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그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그날 아주 오랜만에 찾아와 잠시 들른 그 집 옆집 옛 이웃 아주머니에게서 한 마디를 들은 모양이었다. 지난번 작업하러 왔을 때 엘리베이터로 짐을 나르던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찬바람을 쌩 일으키고 가던 그 이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온 가격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배를 지금의 평균 시세의 절반 정도에 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이상실이다. 정말로 그런 곳이 있으면 제발 우리 좀 소개해 달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답은 정해졌고 더 이상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듯했다. 그분 따님도 몇 번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막무가내여서 소용이 없다고 했다. 결국 단골 고객님의 마음 상하시지 않도록 원하시는 가격에 맞춰 드리겠다고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후려쳐진 값을 사흘 만에 받고 끝이 났다. 물론 도배업자에게는 우리가 견적 받았던 대로 약속된 제값을 지불했다.


팔자 좋게 꽃만 보고 풀만 보며 살 수는 없다. 흙도 보고 돌도 보고, 똥도 보고 욕도 봐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슬프고 화가 났다. 처음엔 돈 때문인 줄 알았다. 그야 당연히 받을 돈 못 받으면 속상하고 화가 난다. 차라리 요즘 경제사정이 어려우니 어느 정도 좀 조절해 달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사수는 얼마든지 기꺼이 맞춰드렸을 것이다. 돈은 좀 잃어도 이렇게 허무하지는 않을 텐데. 20대도 아니고,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이 무슨 열정페이도 아니고! 내가 갈아 넣은 노동이 폄하되고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 사실에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차츰 그것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가을보다도 짧은 것이, 그 짧은 계절에 훅-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도 못하게 가벼운 것이 사람 마음이라는 사실이 슬펐다. 그새 내가 또 뭘 바라고 기대하고 있었나 싶다. 이제 나는 사람에게 또 실망하는 것이 두렵다. 사람을 길게 보는 것이, 그렇게 쉽게 변해가는 마음을 겪고 보는 것이 무섭다.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좀 더 정확히는 그 관계와 인연에 들인 시간과 정성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처음 보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최근 1년 가까이 꾸준히 직접 보고 겪으며 쌓은 신뢰로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던 분이 이 바닥을 잘 알지도 못하고 지나가듯 던진 그 가벼운 말 한마디에 그토록 쉽게 휘둘려 그 신용을 헌신짝처럼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다. 우리의 신의가 싸구려 취급을 당하고 또다시 그렇게 버려진 시간들이 슬프다. 낙엽이 지고, 마음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또 비가 온다. 가을장마다.



어깨와 무릎이 슬프다.

때를 가릴 것도 없이 수도 없이

구부리고 꿇어야 하는

어깨와 무릎을 바라보는 일이 슬프다.

어깨도 닳고 무릎도 닳고

닳고 닳아서 이렇게 쉽게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처럼

깎이고 쓸려나가는 것이

슬프기 그지없다.


그 슬픔에 또 마음이 닳는다.











굽혀야 할 때 굽히지 못하고 굽히지 말아야 할 때 굽힐 수밖에 없는, 솟구쳐 일어나기에는 이제 너무 닳고 지쳐버린 어깨 허리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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