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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서 큰일이다

도루묵은 한순간

by 햇살나무 여운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 다른 세대로부터 같은 작업을 요청받았다. 싱크대 상부장 처짐이다. 이 작업을 또 하게 될 줄 몰랐다.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피하고 싶은 작업 중에 하나였다. 구조적 특성으로 공중부양되어 있는 싱크대 상부장이 세월 속에 버티고 버티다 처지다 못해 곧 쏟아져 내릴 듯한 모습으로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이 아파트에 많은 세대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을까 싶다.



뜯어보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오비이락이라고 겨우 버티고 있던 상부장이 공교롭게도 우리가 손대는 순간 무너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솔직히 좀 많이 무섭다. 어떤 집은 지지목 하나 없이 허공에 그것도 가스배관에 걸려 있는 집도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여전히 무서웠다. 사수 역시 허리와 어깨가 예전 같지 않아서 너무 덩치 큰 작업은 애써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거절도 해봤다. 그런데 선뜻 해주겠다는 업체를 못 찾았는지 의뢰인이 다시 연락이 왔다.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결국 또 덤벼 봐야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확히 같은 구조를 한 번 해 본 경험치 덕분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적 부위를 열어보니 증상의 원인 또한 비슷했다. 지지목을 하다가 말았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목재를 왜 아끼는지 모르겠다. 구멍 몇 개 더 뚫는 걸 번거로워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발 프로라면 프로답게 영구적 안전을 잠시의 귀차니즘과 맞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집이라면 그렇게 작업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열 집을 하든 백 집을 하든 결코 익숙해지지 말아야 한다. 닳고 닳아서 스스로 적당히 타협하는 심마(心魔)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아흔아홉 번을 잘해놓고 단 한 번의 방심이 말짱 도루묵을 만든다. 그 사소한 작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 큰 참사를 불러오는 것이다.

뒷벽과 천장에 지지목을 덧대어 보강하고, 처지면서 전체적으로 틀어진 몸체와 문짝들을 바로 잡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천장 부위를 가려주는 몰딩이 없는 탓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지지목에 시트지를 입혀주는 디테일로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좀 느리고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할 건 해야지.





이번엔 욕실 타일 보수 작업이다. 여기서도 어쩐 연유인지 벽 속 곳곳에 시멘트 반죽이 툭툭 떨어져 타일을 붙잡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하중을 견디다 타일들이 깨지거나 터지면서 점점 더 벽이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욕실 한쪽 벽을 전체적으로 뜯어내고 재시공을 하기로 했다. 뜯어내고 거둬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 언제나 그렇듯 빈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쉽고 자유롭다. 있던 그림을 지우고 다시 하는 작업이 더 번거롭고 어려운 법이다. 다른 부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손끝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기존 타일을 철거하고 표면을 평탄화한 후, 단차를 맞추기 위해 떡밥을 붙이고 타일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속을 골고루 채워야 한다. 타일을 붙이고 곳곳에 간격을 유지해 줄 스페이서를 끼운 후, 돌돌이 평탄 클립을 끼워 네 모서리를 고르게 붙잡아 줄 수 있도록 고정시킨다. 다 해놓고 나니 꼭 타일 벽에 부항을 떠놓은 모양새다. 정말로 부항을 뜨고 싶은 곳은 사수와 조수의 어깨와 등허리가 아니던가?


타일 작업은 하루에 끝낼 수 없다. 넓은 면적이라 하루 정도 속까지 완전히 마르도록 양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잘 마르면, 클립과 스페이서를 제거하고 수건걸이를 원래 자리에 타공해서 다시 붙여 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가장 조심스럽다. 순간 삐끗하면 이 역시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니까. 무사히 성공하고 나면, 매지를 꼼꼼히 채우고 실리콘으로 마감한다. 작업을 모두 끝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다시 바라보며 사수는 스스로 결과물이 마음에 드는지 꽤나 흡족해한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손이 하는 일이 참으로 경이롭다. 가히 "아름답다!" 할만하다.


어라?! 그런데 이게 웬 일! 바로 이 순간, 재미있다. 조수는 분명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앞서 싱크대 보수 작업을 할 때도 즐기고 있는 자신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느샌가 겁 없이 덥석덥석 덤비고 있었다. 손목도 무릎도 허리도 끊어질 듯한데, 이 와중에 재미있어하다니 큰일이다. 재미를 느껴버렸다. 조수는 마침내 이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피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고, 미루고 싶었던 그 수많은 갈등과 고난의 순간을 겪으며 지나오는 동안 이제는 정말로 나의 일이 되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고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깨지고 깨지다 깨져서 거기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자신 안에서 절로 울려 나온다. 이제는 무슨 일이든 그 마음가짐과 태도로 임할 수 있다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비법이라고.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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