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wi eun Jan 15. 2024

필름카메라를 안고 온 청년.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다


임산부가 되어 가게를 정리하고 두 달이 지난 며칠 전. 문득, 한 손님분의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딱 1년 전에 몽상가 카페에 우연히 들렸던 사진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이번에 부산 여행 계획 짜던 중에 사장님 소식을 듣고 디엠을 보내요.

우선 이쁜 아이 가지신 것 너무 축하드리고 꼭 순산하시길 바래요!! 너무 축하드립니다.

작년에 사장님하고 사진 관련 이야기를 신나서 쉴 새 없이 했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비비안 마이어’ 책 읽고 사진 연습도 정말 많이 해서 다음에 몽상가 카페에 찾아가서 이야기 다시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신다면 전국 어디에든 카페는 꼭 다시 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나나 브런치도 너무 맛있었고 무엇보다 22살의 저의 좋은 추억이 남은 곳이거든요.
다시 한번 너무 축하드립니다!



연락을 받고 곧장 떠올린 청년이 있었다.

22년 겨울, 밤색의 따뜻한 겨울재킷을 입고서 필름카메라 하나 손에 안고 오셨던 따스한 청년.


작은 테이블 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달달한 프렌치토스트 한 접시를 천천히 드시고 가셨던 손님.

손에 안고 왔던 카메라 하나를 꺼내 이곳저곳을 찍으신다.

‘어엇? 저건 필름카메라네!’

커다란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수동으로 필름을 넣었다 뺐다 하며 손으로 레버 한 바퀴를 돌리고 신중하게 초점을 맞추곤 다른 손으로 두근거리며 셔터를 눌러 사진 한 컷을 찍어내는 필름카메라. 사진의 결과물을 곧장 보지 못하고 36컷의 사진 수가 다 찍혀야만 필름을 열어보고 현상해, 그간의 추억과 기록물들을 열어볼 수 있는 보물상자 같은 필름카메라.


서른세 살이 된 나는 언제부터였을까. 필름카메라를 놓고 디지털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것이.



20대 초, 중, 후반이 되어서까지도 나는 유독 필름카메라를 좋아했다.

졸업을 하고 상경하자마자 단칸방 서울살이에, 새벽 여섯 시부터 시작되는 연이은 알바시절,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만은 없다며 동대문에서 새벽일을 하고 쪽잠을 자고서 낮은 공연연습에, 오디션에 바지런히도 움직이던 나의 청춘. 여전히 홀로 걷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이때엔 나의 숨과 같은 일상이 걷고, 또 걷는 거였다. 시간만 생기면 하릴없이 걸었다. 낯선 거리와 골목들을 누비며 걷기도 하고 새벽 5시에 동대문거리에 나와 퇴근길을 맞이하면 숨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청계천을 따라 종로까지 걸어 커피 한잔을 마시는 날도 참 여럿 있었다. 이슬 가득 머금은 한적한 새벽의 청계천거리와 종로거리를 유유히 걷다 보면 새로운 풍경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평소 바삐 움직이느라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풀들과 나무, 꽃, 나 살기 힘들다 말하기가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거리노숙인 할머니 할아버지, 밤사이 사람들이 저마다의 한탄과 삶의 무게를 술 몇 잔 기울이며 털어내고 또 털어낸 거리마다의 흔적들, 나뒹구는 술병과 담배꽁초들을 바라보면 눈썹이 찌푸려지다가도 생각했다. ‘다들 힘들겠지. 다들, 필요하겠지. 이것들이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순 없겠지만 순간만큼은 털어내고 싶겠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그 삶의 무게들이 느껴지는 담배꽁초들과 술병들이 마음을 아리게도 했다.

새벽, 종로거리를 거닐면 블록블록을 지날 때마다 노상에 이불과 담요 몇 겹을 두르고 잠을 청하는 어르신들을 많이 만난다. 어린 마음에 처음엔 그 모습이 무섭다가도, 이내 또 생각이 들곤 했다. ‘따스한 방이 있으면 좋겠다. 다들 어떤 사연으로 이렇게 밖에서 지내게 되신 걸까.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면 숙연해졌다. 그런 저런 생각에 하늘 한번 올려다보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가 내 코끝을 살랑이며 휘날렸다.

그럼 잠시 멈춰 서서, 그토록 티 끝없이 맑은 새벽공기를 한 움큼 쥐겠다는 듯 온몸으로 들이마시곤 했다. 꼭 이 공기가 나를 맑게 해주는 것처럼.


그러고 나면 식물들과 자연들이 보였다. 밤사이 내린 빗방울을 예쁘게도 동그랗게 받아 든 조그만 초록 이파리들, 언제나 묵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나무들, 고달픈 삶의 무게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인간세상에 숨 쉴 구멍 하나 더 내어주고 싶다는 듯 찰랑찰랑 예쁘게도 흔들거리던 잔디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새벽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면 모든 사물들과 풍경들이 새롭게 보였고 자그마한 게 크게 보였다.

그 아름다움을 함께 포착해 주는 건, 역시 내 친구 필름카메라. 사물 가까이 다가가 냄새도 흠씬 맡아보고, 카메라를 켜 왼손으론 레버 한 바퀴 싸악-돌리고 신중하게 초점을 잡고 나서 오른손으로 숨을 죽이며 흔들리지 않게 셔터를 꾹, 누르는 일. 그럼 일상에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그 작디작은 사물들이 각자 개성을 지닌 고유한 정체성으로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거리의 꽃, 식물, 카페에서 정성스럽게 나온 드립 커피 한잔, 한쪽 팔에 끼고 다니던 책 한 권.

그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 정성스레 마주할 수 있다. 나의 시선과, 필름카메라와 함께 한다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필름카메라는 그렇게 세상을 볼 줄 아는 나의 단짝 친구였다. 진득하게, 하나를 오래 보고 그것의 참된 아름다움을 더없이 느끼고 발견하는 일.

 

20대초반의 나.
20대 후반. 집에서 책을 읽다, 잠깐 눈을 들면 이 아늑함이 예뻐, 카메라를 들었다.
책을 덮고 옆을 바라보니, 늘 자리해있던 나의 식물들도, 햇볕을 받아 빛나던 테라스의 식물들도. 필름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더없이 느끼고,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집에서 심었던 토마토모종이 어느덧 길고 길게 자라나, 방울토마토를 만들어내고 빨갛게 물든 모습을 마주했을 때.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느끼기도 하고-


좋아하는 카페에 들리거나, 집에서 차 한잔을 할때면 그 고요함과 사색의 시간이 좋아 카메라에 담곤 했다.

매일 함께 하는 찻잔도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바라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 그것 역시 필름카메라와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나의 20대 청춘이 불현듯 떠올렸을까.

아니면 무언의 공통사로 반가움과 어떤 뜻 모를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먼저 말문을 연 건 나였다.


"필름카메라인 거죠?"


"아, 네, 맞아요.

여기도 카메라가 많네요. 사장님도 사진 찍으세요?"


"취미로 간간히 찍어요. 더 어릴 땐 홀로 참 많이 찍으러 다녔는데, 그러질 못한 지 오래된 거 같아요. 홀로 여행 오셨어요?"


"네. 서울에서 혼자 여행 왔습니다. 우연히 들린 곳인데 여기 너무 좋네요."


그리고 우리는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을 각자의 카메라얘기에 빠져들었다. 카메라 기종이 뭐예요?, 3D카메라요? 그런 게 있어요?, 네있어요. 재밌는 친구예요. 세 개의 필름이 함께 움직이는데...


이런 얘기들이 계속해서 오갔다.


"저는 필름카메라는 딱 하나 있어요. 20대 초반, 처음 서울에 올라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쥐고 찾아간 종로의 허름한 카메라 집이 있어요. 필름카메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만 한 곳인데. 혹시 '종로의 맥가이버'라고 불리는 아저씨를 아세요?

서울에서 필름 좀 찍는다, 좋아한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되게 유명한 아저씨인데, 오랫동안 한 곳에서 필름카메라와 관련한 물품 판매부터 수리를 해오신 분이거든요. 수소문해 찾아간 그곳에서 운명처럼 십만 원 안팎에 데려온 중고필름카메라예요. 이 아이, 야시카입니다! 예쁘죠?"


얘기를 하다 보니, 십 년이 다 된 어느 날 종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찾고 찾아 들어간 '종로맥가이버'라고 불리던 아저씨가 운영하던 카메라상점이 생각났다. 그곳에 마구잡이로 진열되어 있던 카메라들 사이에서 제일 싸고 구실을 해내었던 중고필름카메라를 꼬깃꼬깃 들고 온 현금을 내고서 설레이며 가슴팍에 안고 오던 날.


얘기를 하다 보니 손님께선 나와 무려 정확히 딱! 10년의 나이차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딱 손님의 나이에 내가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가장 큰 시절이 있었다.


'나도 저 때 저렇게 홀로 필름카메라 하나 손에 안고, 목에 걸고, 걷고 여행하고 사색하던 때가 있었는데..'


'분명, 아주 감미롭고 따스한 감성과 시선을 지니신 분이겠지. 필름이 주는 따스함과 깊은 관찰은 많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 주니까. 아름다운 시선으로 많은 곳을 홀로 여행하고 계시겠구나.'



손님과 얘기를 나누던 며칠 전, 아주 즐겁게 읽었던 책이 마침 '비비안마이어'라는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오랜만에 너무도 흥미롭고 재밌게 읽어나간 책이라 책을 덮고서도 한동안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았던 책.

한동안 퇴근한 후며, 휴무날을 막론하고 읽던 책.

이 책을 추천드리면 너무 좋을 거 같아, 곧장 이 책을 소개해드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고. 사진의 즐거움을 다르게 또 느껴버렸다고-.



그리고 손님은 이날,

"추천해 주신 책은 꼭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덕분에 부산 여행에 좋은 기억 만들고 가요. 다음에 또 찾아갈게요." 하며 연락을 주시기도 하셨다.





그날하고 정확히 1년이 지난 며칠 전.

그날을 기억해 주시고 또다시 떠나올 부산여행에 새로운 소식을 안겨다 드리러 오실 참이었다며 손님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연락을 받아 든 것이었다.


긴 시간을 두고 날아온 연락에 반가움도 잠시,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비비안 마이어’ 책 읽고 사진 연습도 정말 많이 해서 다음에 몽상가 카페에 찾아가서 이야기 다시 나누고 싶었는데…]라는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정말로 내가 추천드린 책을 읽으셨구나!!

사진을 찍는 데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기도 했구나!'

신기하고, 흐뭇하기도,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가움은 금방 아쉬움으로 남아버렸다.


'몽상가를 계속하고 있었다면 그 뒷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손님께서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단 소식이 이상하게도 날 기분 좋게 해 주었다. 정말로 좋아하시는구나, 사진 찍는 일을.


어쩌면 취미라는 그 일을 언젠가 업으로 삼게 되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경우들을 종종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봐왔으니까.



단순히 '카메라'로 많은 추억과 즐거움을 다시금 되새기고,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축복스럽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꺼내어 오래된 나의 필름카메라 폴더를 열어보았고 까마득한 청춘의 내 기록들과 시선들을 시간 지나 마주해 볼 수 있었다. '아, 이때 이런 감정들을 지니고 살았지. 참, 맞아. 이땐 이런 생각들을 품고 살았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찍은 사진들과 시선을 보니 다시금 그때의 내 생각들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머릿속에 펼쳐진다.


이게 사진의 힘이고, 기록의 힘이고, 연대의 힘일지도.



무엇보다도 순수하게 즐겼던 나의 즐거움을 다시 꺼내어보고 싶어 졌다. 먼지가 살포시 내려앉은 필름카메라를 꺼내어 소독티슈로 깔끔하게 닦아낸 , 필름을 주문해 본다.


그저 순수하고 맑은 시선을 간직했던 어릴 적 나의 오브제가 다시금 나에게 또 다른 영감과 시선을 가져다줄까? 잊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어 줄까? 혹은 그 시절은 지났다고 알려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난 다 즐거울 거 같다. 지난 시절이라고 알려준다면 난 지금의 즐거움을 더없이 누리겠노라고. 잊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어준다면 그것을 또 지금의 시선과 생각으로 버무려 세상을 바라볼 즐거움을 누리겠노라고.

재미난 생각을 끄적여본다.




그리고 맨 마지막 구절,

손님의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한번, 읽어본다.



다음에 기회가 되신다면 전국 어디에든 카페는 꼭 다시 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그런 날이 오면 그때에도 필름카메라를 손에 든 손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때엔 손님의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전 13화 나의 가장 소중한 메뉴, 레몬튜나미니크로와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