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와 낭만'
정말 오래전부터 찜해두었던 카페를 다녀왔다. 사장님의 카페에 대한 애정이 잔뜩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꼭 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읽던 책의 한 챕터에서 카페 이름인 ‘몽상가’라는 단어가 나와서 놀랐다.
세상은 편해지지만, 갈수록 낭만이 없어지고 느리게 움직이는 법을 잊게 만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카페가 생각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토스트 맛있었는데… 너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남기고 말았다.
정말 입구부터 멋졌어요. 빠른 세상 속 나만의 속도를 찾게 해주는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내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사장님께서도 오늘 남은 하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편해지지만, 갈수록 낭만은 없어지고 느리게 움직이는 법을 잊게 만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카페가 생각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빠른 세상 속 나만의 속도를 찾게 해주는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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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정말 지금 세상이 그런 거 같다.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고 있지만 갈수록 낭만은 사라지고 빠르게 움직이라고만 여기저기서 재촉하는 것만 같다. 느리게 걸어가듯 살면서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옆도 보고, 잠시 멈춰 쉬어가며 하늘도 보고. 하나하나 거리거리의 풍경, 그날의 바람숨결을 내 오감으로 느껴가며 살아가는 느릿한 낭만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느리게 움직이면, 잘못 살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 낭만을 지우고 당장의 현실만을 목도한다.
‘그러게…. 나 이런 마음으로 몽상가를 만들었지.
문을 열고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세상에서 잠시 차단되어 귀 닫고, 눈감고, 나만의 여행길을 걷길, 여기서만큼은 모두가 몽상가가 되길…. 그렇게 바라고 상상하며 카페를 구상하고, 하나하나 오브제를 들이고, 가구를 들이고, 조명을 들였지. 그런 마음과 바램이었어, 이 모든 게. 이 모든 시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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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었다. 남편과 함께 가게를 퇴근하고 난 오후, 차정비를 위해 정비소에 들러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토요일. 핸드폰에서 띠리링- 알람음이 들려와 동그란 창에 두터운 엄지손을 갖다 대니 곧장 몽상가의 입구 간판사진이 화면에 떴다.
그리고 몽상가 계정이 태그 걸린 채 쓰여있던 문구들. 손님의 인스타그램이었다.
손님분들께서 카페를 다녀가고 리뷰가 남겨지거나 사진이 올려지거나, 스토리가 올라가는 순간이면 언제나 긴장과 함께 설레임이 밀려온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 공간에서 어떠한 감상이 생겼다는 것이니까. 어떠한 인상이나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
'그것이 좋은 것이면 좋을 텐데….’
두근거리며 찬찬히 글을 읽어 내려간다.
아주 찬찬히 곱씹으며 읽었고, 글을 다 읽은 후 나는 소리를 내어 한숨 아닌 탄식을 내비쳤다. “하ㅡ….”
“응? 무슨 일이야?”
남편이 옆에서 호기롭게 물어오는데도 내 입에서는 대답보다 감탄만이 자꾸 터져 나온다.
"세상에…”
“왜, 무슨 일인데~?”
“자기야, 이거 봐봐.”
달리 이걸 설명할 방도를 찾는 거보다 이 글귀를 보여줘야겠다, 는 생각만 든 채 핸드폰을 남편에게 넘겼다.
“오….”
이건 남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리액션이랄까. 푸흐흐. 아마 누구라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이 격하게 감동스러웠다.
깨끗하고 맑은 강릉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햇빛 받아 반짝이는 윤슬 위로 잔잔하게 파도치는 강릉 바다의 물결처럼, 내 마음에 차르르 감동을 스며주는 문장들이었다.
내가 원하던 감상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진하게 전달되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벅찼다.
‘그런 시간을 보내셨구나, 느린 시간이 필요하셨구나, 그리고 몽상가가 그런 위로의 공간이 되어주었구나.’ 생각하니, 왠지 모를 애잔함도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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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카페를 차리기 전, 내가 항상 전전하던 곳들이 그런 곳들이라서 그럴 테다.
학창 시절이든, 20대의 끝자락이든 나는 언제고 어떤 상황에서건 시간만 나면 세상의 소음과 조금은 차단된 채 나 홀로 여행을 할 수 있고, 때론 사색도, 몽상도 할 수 있을 그런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하루의 내 삶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고 고갈된 혹은 고갈될 그날의 나를 충전시켜 줄 비타민 같은 시간.
꼭 집에서 그 시간들을 가지면 그 생각의 무게들이 너무 고독하고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고, 적당히 사회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내 공간이 생기는, 카페가 좋았다. 꽤나 고요한 분위기이지만, 곳곳의 의자엔 다른 이들이 빈자리를 메꾸고 있고 따스한 클래식과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며 생각에 집중을 요할 수 있는 그런 차분한 분위기. 대개는 베이지 톤의 분위기에 원목으로 공간이 채워져 있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나는 나무가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니까. 그게 내가 찾는 카페 중 핵심 요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그런’ 카페를 찾아가, 책을 읽든 명상과 같은 시간을 보내든, 글을 쓰든 생각을 정리하는 일종의 나만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든 잘 살아낸 거 같았다.
하루의 끝이든 중간이든 시작점에 그 몽상가와 같은 나만의 시간이, 내게 일상의 리듬과 같은 일정한 틈을 내어 주었고 숨을 쉬게 해 주었으며 나를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나는 20대 내내 그 생각만을 하며 살았던 거 같다. ‘나다움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답게 살래요.’, ‘내가 오롯한 나 자신일 때가 행복하니까, 나는 타협하지 않고 오롯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래요. 내가 나일수 있는 삶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더 깊게 찾아가면서요.’ 나다움을 잃어버리면, 내 삶은 사라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원하는 삶을 계속해서 찾아나가고 그 삶에 안착하는 것. 나라는 사람의 개성을 스스로 무너뜨리지 않는 것. 그것을 지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어렵다. 그래서 20대 전체를, 나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던 거 같다. 그리고 그 노력이, 지금은 감사하다. 헛되다고 느꼈던 그때의 방황이, 그때의 내가, 감사하다. 누구보다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 행복하고 어떤 상황에서 불행한지 스스로 잘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살 줄 알게 되었으니까. 적어도 내 삶을 자기주도적으로 살 줄은 아는 어른이 되었다고 나는 조금은 자부할 수 있다. 왜냐면, 지금 내 인생이 꽤 만족스럽고 꽤 행복하니까. 여태껏 그 모든 선택들은 줄곧 내가 내린 선택들로만 이어져있으니까. 충만한 인생이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연습하며 살아갈 테니까, 살아가는 과정 속에 모든 선택지에 적어도 제일 나다운 선택에 체크를 해나가며 살겠지. 그것만으로도 후회는 없다. 어떤 삶에도 후회 없는 삶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말하는 '후회는 없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알고 그 어떤 선택보다도 최소한의 후회만이 남을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안다는 것이고. 그만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저, 그런 삶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려면_ 꼭 나와 친해져야 하고 그러려면_ 나와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 가장 괴롭고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갖는 일종의 하루 패턴과 의식 덕에 '고요하고 단정하고, 영감이 들어찰 만한 나만의 기준이 되는 어떠한 공간, 카페’ 또한 자연스레 내 삶의 중요한 하루 일과 속 한부분이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턴 참 자주 상상했던 거 같다. 나 같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읽던 책도 덮고, 쓰던 글도 중단하고 먼 차창을 바라보며 그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림을 그리고 메모를 하며 이 공간이 탄생될지도 모르곤 내가 그려왔던 카페의 모습을 많이도 남겨두었다.
가끔은 카페에서 내주는 정사각형의 네모난 휴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 그림들이 있으면 내 눈앞에 있는 어떤 메모장이든 펼쳐내어 끄적여놓고, 핸드폰 메모장에도 써놓고.
그게 몇 년에 걸쳐 꽤나 많은 자료들이 되었고 나는 가끔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는 그것들을 우연히 발견하면 잃어버리지 않게 찢어서 한 곳에 모아두어, 하나의 수첩형태로 만들어두었다.
양탄자 같은 페르시안카페트, 토분에 담긴 화초들, 조금은 낡은듯한 빛바랜 커다란 세계지도, 돌돌돌 말린 영화포스터들, 그리고 그것들을 담은 라탄바구니, 슬며시 공간을 지배하는 옅은 인센스스틱의 향기, 낮은 조도의 주광색 led전구들, 정갈하고 깔끔한 원목 가구들, 벽 한켠을 전부 혹은 곳곳의 벽들을 수놓은 내가 사랑하는 책들, 빵 냄새를 폴폴 풍겨올 부엌 한 켠의 커다란 오븐, 고소한 커피향기도 함께 내뿜을 그 옆의 작은 머신기…. 그리고 잔잔하게 큰 울림을 건네주는 영감의 원천, 클래식과 재즈소리.
늘 그려왔던 모습은 항상 비슷한 모습이었다. 몇 년 동안 그려왔던 내 카페의 모습은 꼭 하나의 모습과 같았는데 훗날 그렇게 깨작거려 완성된 하나의 수첩이 결국 ‘카페 몽상가’를 만들어내었다. 수많은 메모들과 낙서들과 그림들이 이 공간의 전체가 되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 공간의 1부터 100까지, a부터 z까지 오롯이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카페를 처음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테리어다. 인테리어의 첫 틀이 운영을 지속하는 내내 공간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이 공간의 정체성이 될 것이며, 그 공간 속에 매일을 머무는 것은 누구보다도 주인, 나. 그리하여 내가 가장 행복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손님들에게도 그 행복감이 전달될 테고 그와 비슷한 감성과 취향의 손님들이 함께 하게 될 테니까.
무릇 그뿐이 아니다. 인테리어는 아무리 작은 평수라 해도 천 단위가 왔다 갔다 하는 금액이 들어간다. 허투로 생각하고 그저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음식에도 그렇지만, 공간에 있어서 가장 많은 주인의 취향과 니즈, 철학과 같은 것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인테리어가 아닐까 싶다.
그것을, 나는 놀랠 만큼 돈 몇 푼 안 들이고 모든 공간을 만들어냈으니, 아마 이리 오랫동안 몽상하며 ‘혹시나 언젠가 내가 카페를 차리게 된다면…’의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메모와 깨작거린 그림들과 낙서들이 없었으면 이리도 뚝-딱 그려내고 구현해 낼 수 있었을까.
처음 몽상가를 오픈하고 지인들과 친구들이 가까이에서, 먼 곳에서 여기저기 찾아왔을 때
다들 가장 먼저 꺼낸 말이 하나같았다.
“이야~ 여기 그냥 강귀은 공간이네.
여기 그냥 니 공간이야.
누가 봐도 이건 네가 만든 공간이 확실해.”
내 취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들이, 입을 맞춰 감탄하며 한 말들이었다.
그냥, 공간만 봐도 네 공간이라고.
네가 이 카페의 주인장임에 틀림이 없다고.
그러면서 기가차다는 듯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이렇게 설명 하나 필요 없이 너라는 사람을 공간으로 구현해 냈냐는 듯-
오브제들은, 대개 누군가의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있는 빈티지물품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구해왔던 찻잔들과 물려받은 찻잔들,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서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해 온 고전, 소설, 잡지, 에세이, 사진집들, 이미 고장난지 한참 되었지만 올려만 놔도 멋들어지게 공간을 장식해 주는 골동 카메라들, 좋아하는 조그만 독립서점 사장님께서 선물로 건네주셨던 lp판, 자취할 때부터 들고 있었던 오래되고 낡은 원목 책장.(이 원목 책장은 2만 원 안팎으로 샀던 것인데, 몽상가에서는 책장이 아닌 찻잔 수납공간이자 장식장으로 이용되었다. 고작 이만 원이라며 우스워보일 지도 몰랐을 이 낡은 원목책장은 아주 멋들어지고 아름다운 제 역할을 톡톡히 한자리에서 뽐내고 있었다.)
클래식과 재즈를 공간에 울려줄 스피커만큼은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고 싶어, 예산을 아끼지 않고 좋은 것으로 사서 공간 한 켠에 시니컬하듯 자리해 두었고 그 덕에 몽상가에선 늘 음질 좋은 노래들이 아낌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명들은 늘 그려왔듯, 주광색 전구만으로 원하는 위치에 줄줄이 매달아, 유럽 어느 자연 속 산장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비는 공간 곳곳엔 내가 사랑하는 영화 포스터의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공간은 어느 한 개성을 띄게 되었는지 우리 가게엔 비슷한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아주 많이 찾아오시기 시작했다.
문학에 몸을 담고 계신 분들, 잡지사에 일하신다거나 칼럼니스트라거나, 예술계통에 있으신 분들, 영화를 하시는 분들, 사진을 찍는 분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분들,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 각양각색의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로 모여졌다.
이 공간에서는 책얘기, 영화얘기, 카메라와 사진 이야기가 수없이 왔다 갔다 하였으며 홀로 책과 노트북을 들고 예술의 혼을 불태우는 분도, 사색의 시간으로 긴긴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도 많았다.
그럴 때면 그 시간을 마음껏 향유하길 바라며 나는 한 구석에서 내가 없다는 듯, 책을 펼쳐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슬금슬금 그 시간이 흐뭇하다는 듯 엿보기도 하며.
그러하였으니 이런 감상이 글로 남겨지고 전달이 되었을 때 내 감동이 얼마나 컸을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려낸 카페였고, 그런 카페로 인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이 공간을 메꿨을 때 생겨난 공기들이 참 좋았다.
그 공기들에 섞여 있는 나도 좋았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바쁘고 너무 사람들이 몰려서 정신없이 전쟁과 같은 하루하루들을 보낼 때,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공간과 공간을 튕겨내며 가득 사운드를 채워낼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들어왔다가 황급히 자리를 일어나는 손님분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때론, 너무 조용해서 고요함만이 이 공간을 메울 땐,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매출은 하릴없이 낮은 모습으로 보답하여, 그것이 결국 비단 나만의 개인적이고 감성에만 미쳐버린 하나의 이상일뿐이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사색하는 공간? 몽상가가 되는 공간? 그거 너무 좋지. 너무 좋은데…. 그걸 추구하다가 결국 이 공간을 오래 이어가지 못하면? 그게 내 생계를 무너지게 하면 결국 나 혼자만의 만족에 그치는 공간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너무 감상적으로 시작한 걸까. 역시 매출을 내야 하는 가게라는 공간에 상업적으로 다가가는 게 맞았던 걸까.’
그런 생각들을 자주 했음에 고백한다.
그리고 이 코멘트를 마주했을 때,
손님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생기는 몽글몽글함이 마음속에 목화꽃 피어오르듯 하얗고 둥글게 일어 올랐다.
그리고 그 벅참은 무슨 벅참인지 모를, 아직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찾지 못한 채
가슴속에 간직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손님이 이 공간에서
“세상은 편해지지만 갈수록 낭만은 사라지는 현실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법을 찾고,
빠른 세상 속 나만의 속도를 찾는 시간”
을 가져주어서 감사하다고,
그런 시간을 이 공간에서 즐겨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덕분에, 잊고 있던 ‘나만의 느린 시간’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