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i
pei.
그녀의 이름은 페이.
대만에서 온 페이는 겨울날 어느 수요일에 가게에 들렀고, 그로부터 약 일주일간 대만으로 돌아가는 화요일 전, 월요일까지 가게에 함께 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월요일 퇴근 후 함께 내 차를 타고 가까운 바닷가 송정으로 나가 멋진 통창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을 두고 대화의 꽃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얘기한다.
ㅡ
1월 25일 수요일.
잔잔한 시간에 누군가 들렀다. ‘뭔가 모르게 대만영화에 나올 법한 인상착의다..!’ 생각했는데, 웬걸. 정말 대만에서 온 손님이었다. 타이완. 호기롭게 가게에 들어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나에게 다가와 건넨 첫 질문이 “비건 음식은 무엇인가요?”였다. 페이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베지테리언식을 하고 있었고 (우유와 달걀은 먹는 채식.) 약 7년을 넘게 요가수련을 하고 있기도 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페이에겐 언젠가 요가선생님이 되는 꿈이 있었다. 페이가 대만으로 돌아가기 전, 둘이서 드라이브를 떠나 간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페이같은 요가선생님이 있다면 나의 정신과 몸을 맡기고 긴 시간 수련을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는 진중하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느끼기도 했으니까. 그런 선생을 두고 수련하는 건 얼마나 또 값진 일일까.)
첫날은 검은콩두유라떼에 프렌치토스트를 시켰다.
식사를 하다가 내가 곳곳에 놓아둔 책들을 만지작 거렸고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데미안 demian 영문판 책을 집어 읽기도 했다. 곧 책을 내려놓고 페이는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는데 이 대화가 시작점이 되어 일주일간 우리가 긴긴 대화와 취향을 나누게 될 줄은 우리도 몰랐겠지.
신기하게도 취향과 결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아주 긴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쉽게 느낄 수 있는 거 같다. 서로가 비슷한 취향에 끌리고 있고 그 공통분모가 확실하다는 것을..!
그 취향의 접점이 ‘문화’에 있다면 그 힘(서로를 끌어당기는)은 더 강력하다.
페이가 부산에 왔을 때는, 대만의 긴 연휴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에 홀로 한국여행을 온 페이는 서울엔 당일치기로 하루만. 그리고 줄곧 부산에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다. 어째서 일주일이란 기간 동안 부산에만 있는 건지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아주 심플했다. “영화를 보러 왔으니까.”
그랬다. 페이는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는 영화광이었는데, 그 취미가 나와 맞닿아있었던 것이다.
“그럼 영화의 전당에 주로 가겠구나?”
“맞아. 거기서 거의 매일을 영화 볼 거야. 그러려고 부산에 온 거야.”
그 여행길은 또 얼마나 멋진가, 생각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위해, 오직 영화만을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일주일을 보내기로 한 페이가 당차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라면, 하나의 목적이 아닌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확실하고 당돌한 목표 하나를 두고 여행을 온 페이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으리라.
우리는 아주 쉽게 대화에 빠져들었다.
각자가 좋아하는 영화들, 배우들, 감독들 얘기가 끝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며 내가 가장 신났던 부분은 대화의 내용도 있었겠지만, 페이의 분위기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풍겨지는 페이만의 감성과 분위기. 그리고 페이가 사랑하는 영화들을 나열했을 때 즐거웠던 건 지금 페이의 나이처럼 나의 20대 초중반시절 빠져보았던 영화들을 지금은 페이가 나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페이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페이가 알려준 수많은 영화들은 이미 20대에 다 보았던 영화들이었고 그것들은 정말 그 시기였기에 나에게 다가오고 즐거움을 줄 수 있었던 영화들이었다. 30대가 되고 많은 걸 지나쳐 온 나에게 이제 그 영화들은 추억 속의 어린 시절 감성영화일 뿐인데 말이다. 전혀 감흥이 생길 수 없는 지나간 내 청춘의 영화들을 이제는 페이가 어린 시절 나처럼 눈을 반짝이고 읊고 있다. 근데 그것이 나를 다시 그 청춘으로, 20대로 잠시 시간여행을 시켜준 것이다.
그 영화들이란 것이 대부분 로맨틱하고, 감성적이고, 감미로운 청춘과 같은 영화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대만영화 특유의 청량하고 맑고 순수한 영화들도 꽤나 많았다. 그리고 멋진 건, 그 영화들을 내 앞에서 읊는 페이가 꼭 그 영화들의 주인공들과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만 혹은 중국 청춘영화들이라면, <안녕, 나의 소녀> <말할 수 없는 비밀> <나의 소녀시대> <남색대문> <먼 훗날 우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와 같은 달달하고 맑고 깨끗한 청춘과 사랑을 담은 대만특유의 순수청춘연애드라마. (30대가 되면 자연스레 이런 감성은 멀어지는 걸까. 어릴 적 순수하게 보았던 사랑스런 영화들이 지금은 보라고 해도 조금은 오글거리기까지 하다니. 세월은 취향도 바꾸어주기도 한다.)
뭐랄까…. 그 여주인공의 분위기란 것은
차분하고 잔잔하면서도 감성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면서 맑은 사랑이 있고 부드럽고 순수한 마음이 깃든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분위기를 더욱 내게 자아냈던 건 (물론 페이는 의식한 행동이 아닌 본인 모습 그 자체이겠지만, 내겐 ) 커피를 마시며 커~~~다란 종이 지도를 펼쳐내는 모습이었다.
구글이나 핸드폰 지도를 켜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종이 지도를 펼쳐서, 곳곳의 여행책자도 꺼내 볼펜으로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치고 메모를 하며 갈 곳을 정하고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꽤나 나에겐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모습조차 나에겐 정말 ‘대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낭만이란.
페이에겐 그런 낭만이 폴폴 풍겨 나왔다.
그리고 나는 페이와 함께 하는 동안 그 낭만에 함께 젖어가기도 했는데, 페이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그날 그날은 꼭 퇴근 후 집에 도착해 대만 영화를 틀어봤던 것이다. (학창 시절 이후로 얼마 만에 대만영화를 찾아보았는지!) 그리고 학창 시절의 나로 돌아가 몽글몽글한 감성을 되찾기도 했다.
산책을 하면서 대만영화 ost를 다시 찾아 듣기도 했고, 추억 속의 ost노래가 이어폰 사이로 흘러 내 귀에 감미롭게 스며들 때면 되살아나는 추억으로 몸서리치게 행복해하기도 하고 순수하던 교복 입은 나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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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요일에 첫 만남을 시작으로 다음날인 목요일, 금요일, 주말, 그리고 페이가 대만으로 돌아가는 화요일의 전날인 월요일. 일주일간 총 5일을 페이는 가게에 들러 대화를 이어나갔다.
첫날은 프렌치토스트, 둘째 날은 아보카도타프나드토스트, 셋째 날은 당근라페샌드위치, 넷째 날은 커피 한잔. 그리고 월요일은 내가 마치는 시간에 맞춰 가게에 들렀고 우리는 함께 내 차를 타고 짧은 드라이브길에 올랐다.
카페에서 만나 긴 인연이 되고, 여전히 연락하는 많은 손님분들이 있지만 따로 사석에서 만남까지 이어진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이상의 인연이 된다는 건 많은 어려움을 또 내포하고 있으니까.
그 많지 않은 경우 중 한 명이 페이였다.
자연스레 헤어지는 날의 아쉬움이 ‘우리 짧게 드라이브하고 커피 한잔 할까?’가 되는 만남.
그렇게 우리는 월요일 오후, 송정바닷가가 드넓게 펼쳐져 보이는 멋진 통창 유리로 된 카페로 향했다.
각자 커피 한잔씩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여태 그랬듯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이 날엔 주제가 참 다양했다. 대만과 한국의 비건문화에 대해, 요가에 대해, 각자 살아온 삶에 대해, 미래의 꿈에 대해, 끝내지 못한 취향들의 공유, 세계의 정치에 대해서까지.
페이는 대만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해, 번역 쪽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영어실력이 상당했다. 여전히 대화에 고군분투하는 건 나였는데 그렇게 말이 막힐 때마다 페이는 날 기다려줬고 나는 열심히 구글번역기를 돌려 페이 앞에 보여다 주곤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 물론 내가 영어를 못해서 생기는 아쉬움이 가장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장벽도 결국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것은 꽤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지’라는 것은 곧 이 인연에 대한 애정이고 의지이니까. 그만큼 서로가 마음이 동했다는 뜻일 테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르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인연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는 것은 꽤 일상적인 경우는 아니니까. 특별하고도 귀중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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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 일주일을 만난 뒤, 벌써 1년이 다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 내용의 98퍼센트쯤은 모두 영화와 책 추천이다. 페이스북은 대학생 때 이후로 안 한 지 오래다. 그런 페이스북을 다시 깔게 만든 건 페이였는데, 페이가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로 소통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페이스북메세지에 알람이 뜨면 그건 모두 페이의 연락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Hi guien! Hope things are well with you!”
<AFTERSUN>
“Went the cinema the other day to see this film - really good!”
“I wanted to see it when i was at busan cinema centre but it was only released after my departure”
-oh, thank you! I founf it! Did you like the movie?
“I do! Its a story about a daughter’s memory of her fathers when she’s little. I like how the characters are portrayed in the film - very honest and natural. I’m also a fan of paul mescal (the father.) he’s an irish actor same age as me. His debut drama “normal people” is really good as well. Let me know if you enjoy the film ^^”
이런 연락과 대화가 페이스북메세지에 끝이 없이 이어져있다.
서로 주고받고 추천한 영화포스터 사진들도 가득하다. 그리고 이렇게 문득 페이의 연락을 받고서 메세지를 읽다 보면 페이의 흥분되고 신난 목소리가 생생히 전달되는 느낌이다. 좋은 영화를 봐서 곧장 알려주고 싶은 마음 가득 안고 달려와 흥분된 목소리로 신나게 알려주는 페이의 목소리를.
그 안에서 페이가 얼마나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는지 텍스트만으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으며, 그 즐거움을 같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도 절절히 느껴져서 페이의 연락이 오면 내 기분도 덩달아 고취된다.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면 이럴 수 있구나,를 페이를 통해 또 느낀다.
영화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만났으니 나는 앞으로 볼 영화가 없어 선택하지 못할 테면 신나게 뛰어가 추천받을 페이가 있다. 든든한 나의 문화친구.
아마 우리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뜨문 뜨문, 문득문득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고 신난 어떤 날 서로에게 또 연락을 하겠지.
그렇게 연락을 취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렇게 살아가겠지.
페이의 말대로, 언젠가는 대만에서 페이와 비건식당을 찾아 돌아다니고 좀 더 능숙해진 영어실력으로 서로 더 많은 영화를 공유하고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길게, 길게 이 문화와 취향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면 좋겠다.
좋아하는 문화를 통해 두근거리고 설레어하고 신나 하는 그 어린아이 같은 즐거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