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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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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Jul 15. 2023

운: 기회 잡기


운(運):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
어떤 일이 잘 이루어지는 운수.


“엄마, 내 펜싱 마스크 안으로 흐르는 눈물 봤어?”

“울었어?! 눈물 났는지 몰랐어. 멀기도 하고, 마스크 때문에 안 보였어.”

 

“지자마자 울었어. 눈에서 눈물이 조금 팡 터졌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는 길을 손으로 그리며) 이렇게.


이번에 다 물릴 칠거야!!”

 

7월 대회를 약 일주일 앞두고, 펜싱클럽으로 가는 길에 호제와 나눈 대화다. 6월 대회의 마지막 경기 여운이 여전히 있었나 보다.

 

6월 대회 후 나의 장기출장 일정 때문에 호제는 펜싱클럽에 2주 동안 두 번 밖에 못 나갔다. 엄마 때문에 펜싱을 못 갔다고 볼멘소리를 하던 때, 선생님이 레슨을 한 번씩 더 나오면 어떻겠냐 호제에게 제안했다. 호제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라고 안 했다. 그대가 간 거다.) 대회 나가기 2주 동안 각 주에 한 번씩 더 펜싱클럽에 갔다.

 





어랏! 피로가 쌓인 건지, 힘이 달리는지 대회가 다가올수록 수업이 끝날 무렵 호제의 팔과 다리는 휘청 휘청거렸다.


호제는 성장론을 한창 펼치던 때였다. “내가 펜싱 처음에는 16등이었지?! 그다음에 11등이었지?! 이제 8강 가면 난 성장하고 있어.“ 손가락으로 상승 곡선을 그려내며 말하곤 했다.


마침, 이번 7월 제천대회에 1-2학년남자 에페는 호제를 포함해 8명만 나간다. 예선 경기로 등수를 부여하고, 8강-4강(준결승)-결승전으로 최종 순위가 결정된다. 8강까지 자동패스다. 그래서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호제는 이미 성장을 한 꼴이 됐다. 운이 좋으면 메달을 딸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업 막바지에 힘 빠진 호제를 보며, 이번 대회가 메달보다는 끝까지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 호제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장론을 지지하는 경험이 되길 바랐다.


 




대회 당일 7시 30분부터 장비검사, 9시 예선경기 시작이라 하루 일찍 제천에 갔다. 숙소에 있는 2층 침대를 보고 신난 호제는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그래, 2층 침대 좋을 나이지.


새벽녘 “엄마, 이리와 줘.”라고 호제가 말했다. 새벽에 2층으로 올라가 같이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제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잘 잤다!!!”

 

(와, 잘 잤다고?! 와,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어?!)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잘 잤다니 고마우면서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또랑또랑한 발음에서 기분 좋음이, 신남이 느껴졌다.

 





한층 아래에 있는 공용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호제는 처음으로 토스트 기계를 사용해 가족들이 먹을 빵을 구웠다. 딸기잼도 짜보고. 구운 계란과 반숙계란 2개를 차례로 뚝딱 먹어치웠다.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로 말끔히 옮겼다.


경기복으로 갈아입으니 이제야 긴장한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결연함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얼굴 근육도 살짝 굳어있다.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차로 5분 걸렸다. 이전 경기장들과 다르게 아담한 경기장이었다. 앞에 있는 분들을 따라 펜싱칼을 뺀 나머지 장비를 검사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다시 가서 칼 점검을 해주셨다.



 

예선전이 시작했다. 휘청이던 호제가 사라졌다. 수업 때 배운 포즈를 모두 구사하지 않았지만, 본인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목 놓아 외치는 코칭을 호제는 듣고 있었을까. 동시득점을 계속 반복하는 경기에서는 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떤 경기에서는 호제도, 상대방도 계속 공격기회만 보다 시간을 지체해 검은색과 흰색 원이 그려진 카드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경기에 들어가는 호제에게 배웠던 거,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랬는데. 다음에는 ‘거’를 ‘동작’으로 바꿔 말해볼 참이다.


호제는 예선전 2등, 같은 클럽 2학년 형아는 3등으로 8강에 올랐다. 각자 다른 선수와 경기를 붙어 둘 모두 이기면, 4강에서 만나는 대진표였다. 8강 경기에서 호제는 승을 거뒀다. 2학년 형아는 졌다.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호제는 2학년 형아가 붙었던 상대선수와 4강에서 만났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멀리서 봐도 느껴지는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코칭, 보호대도 없이 선생님 배에 칼을 찌르는 연습까지 시키는 열정을 호제는 느꼈을까. 4학년 누나와 2학년 형도 함께 호제 곁을 지켰다. 준결승전에서 호제는 졌다.


결승전에는 못 갔지만 동메달을 획득했다. 첫 메달이다. 호제의 뿌듯함이 하늘을 찔렀다. 기쁨의 에너지가 종일 호제 몸을 감돌았다.


집에 돌아온 호제는 본인의 경기를 복기하며 “오늘 내 경기의 공격력은 셌어. 지구력은 좀 약했어. 수비력은…(말을 잇지 않았다). 다음 대회에서는 나 플래시를 꼭 해볼 거야!!”라고 평하며 다음을 다짐했다.





 


이번 대회는 운이 좋았다. 같은 클럽 2학년 형아가 얼마나 잘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다른 클럽 형아도 지난 시합에서 만나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운 좋게도 예선전에서 만나지 않았다.


이 운을 기회로 만들어 손에 꼭 넣었다.


여기서부터 내가 호제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어떻게, 언제 얘기해 줄까 생각하다가 호제가 좋아하는 샤랄라 샹들리에가 걸린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이 이야기를 건넸다.

 

“호제야, 제천 경기에서 호제 정말 잘 해냈어. 칼이 무거웠을 텐데 끝까지 잘 버텼어. 몸도 피곤했을 텐데 레슨도 한 번 더 늘려서 가고. 열심히 연습해서 끝까지 해낸 호제 스스로를 많이 축하해 줘. 스스로 꼭 안아주며 토닥토닥해 주자. “


호제 손을 교차해 몸통을 감싸게 해 줬다. 토닥토닥하며 축하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남았어. 호제가 호제 스스로 해낸 것도 있지만 거기에 힘을 실어준 많은 사람들이 있어. 감사한 일이 있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호제가 운을 기회로 만들었어. 여기에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해. 생각해 봐.


레슨부터 경기장에서까지 목놓아 외치며 코칭해 주셨던 클럽 선생님들, 함께 운동했던 형아누나들, 서로 다치지 않고 경쟁했던 상대편 선수들, 아빠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펜싱도 하고 숙소도 잡을 수 있었지. 밥벌이로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움이 컸을 거야. 외할아버지가 먼 곳에서 먼 곳으로 호제를 태우고 운전해주시기도 하고, 말랑할머니는 곁을 지키며 시합할 때 조마조마해서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때도 있으셨대. 멀리서 응원의 마음을 전한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숙모, 사촌들. 그리고 호제 조율자, 응원자, 많은 역할을 수행한 나! 엄마. 하하하하하


호제와 연결된 많은 감사한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이야기 처음에는 ‘내가 혼자 한 결과가 아니라고?!’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그런가?’라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안 된다.


마지막 대화는 8월 홍천 숙소를 체육관 근처로 빨리 잡자로 끝맺었다.


세상 일은 나 혼자의 잘남으로 이뤄지는 건 없다. 가깝고 혹은 멀게 연결된 사람과 자연의 힘이 항상 어우러진다. 즐거운 일의 기쁨을 양껏 즐기되,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일이라는 것도 생각하는 호제로 쑥쑥 자라길!



이 운을 기회로 만들어 손에 꼭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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