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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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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Jun 13. 2023

응원: 결국엔 내가!


응원(應援): 
1. 운동 경기 따위에서,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2. 곁에서 성원함. 또는 호응하여 도와줌.



“할머니,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없었어.”


일요일 저녁, 말랑 할머니에게 호제가 말했다. 그때 어땠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팽이 접기를 잠시 멈추고 호제는 내 눈을 보며 답했다.


”무서웠어. “




 


5월, 첫 펜싱대회에 이어 6월 펜싱대회에 출전했다. 6월 대회 예선전에서 3승 2패를 기록하고 16강에 진출했다.


16강이 열리는 피스트(선수들이 올라가는 길쭉한 경기장을 지칭함)에 호제가 올라섰다. 4분 동안 8점을 먼저 채우는 사람이 이긴다. 상대편 선수의 2명 코치 중 한 명이 호제의 전선 코드를 꼽아주고, 자신의 선수에게로 걸어갔다.



심판은 플랫(준비), 알레(시작)를 손짓과 외침으로 알렸다.



호제가 2점 선취 득점을 했다. 뒤이어 동시득점으로 호제는 3점, 상대선수는 1점을 획득했다. 3:1의 상황. 이후 상대선수가 2점을 획득하며 3:3 동점이 됐다. 이때부터 동시득점의 향연이 시작했다. 4:4, 5:5.



심판은 잠시 휴식시간을 부여했다.



호제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멀뚱멀뚱거리자 심판은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마침 이때 선생님이 나타나 의자를 마련해 줬다. 선생님은 무언가를 호제에게 얘기하고 다른 아이들의 경기 쪽으로 이동했다. 여러 아이들의 시합이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호제는 의자에 앉아 상대편 선수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좀 더 왼쪽으로 돌렸다. 천장을 보기도 하고, 다른

경기를 보기도 했다. 두 다리를 모아 흔들거리기도 하고, 한 다리를 흔들거리기도 하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그 시각 상대선수 코치님 두 명 중 한 명은 상대선수를 의자에 앉히고 옆에서 무언가를 설명을 하고, 나머지 한 명은 포카리스웨트를 갖다주고 쪼그려 앉아 상대선수에게 무언가를 얘기했다. 상대편 코치님은 호제를 잠시 봤다가 상대선수에게 무언가를 또 얘기한다. 그 모습을 호제도 지켜봤다. 상대편 상황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호제의 모습이 보였다.


 




경기가 재개됐다. 또다시 동시득점이다. 6:6. 상대편 코치님이 달려 나와 칼을 휘어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검지 손가락을 들며 원포인트라고 말한다.


또다시 동시에 불이 들어왔다. 7:7. 상대편 코치는 박수를 치며 검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외친다. (아마도 1점 혹은 원포인트였겠지?!) 상대선수는 고개를 돌려 그런 자기 코치님을 쳐다본다. 호제도 같이 상대편 코치님을 바라본다.



8:8. 또다시 동시득점이다. 이 순간 상대편 코치님이 칼을 휘겠다는 제스처를 하며 달려 나온다. 심판은 오른손 손바닥을 돌려 제지하는 모양새를 보였으나 이미 상대편 코치님은 들어와서 칼을 휘어준다.



그 순간 호제가 뒤를 돌아 두리번거린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자에는 3학년 누나가 앉아 있을 뿐이다.


이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심판님, 우리 호제 칼도 휘어주세요!! 난 2층 관중석에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힘내라는 ”호제 파이팅! “이라는 외침뿐.


 




 


이제 마지막 한 점을 가져가는 자가 승자가 된다.


 


플랫, 알레! 삐!



상대 선수가 점수를 가져갔다. 불이 켜지는 순간, 상대편의 코치 선생님은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했다. 선수들은 칼 악수를 했다. 경기는 끝났다.


 


 


호제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 갈팡질팡거린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원장님께 여쭤보라고 소리 질렀다. 호제도 나에게 뭐라고 짜증 섞인 말을 전한다. 무슨 말인지 서로 못 알아들었다.


호제는 피스트 밖으로 나가 2학년 하준이 형에게 갔다. 하준이 형이 호제 등을 토닥인다. 하준이는 나를 향해 “호제랑 옆에 경기보고 같이 올라갈게요.”라고 말한다. 나는 “고마워!”라 외쳤다.


 




 


아이들이 대기장소로 올라왔다. 저 멀리 호제의 얼굴에서 기쁨, 서러움, 아쉬움이 마블링처럼 한꺼번에 나타났다. 눈은 반가움에 반짝반짝, 입은 꼭 울 것 같이 일그러지고, 몸에서는 분함이 뿜어져 나왔다.


호제는 씩씩거리며 장갑과 윗옷을 벗었다. 잘했다고 말하는 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하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운다. 매트에 벌렁 누워 “나 죽을 것 같아! 으허허허허허어엉 저 형아 미워 으허허허허허허허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속상하구나. 충분히 잘 해냈어. 혼자서 마지막까지 경기를 이끌어온 거야! 형은 2학년이고 4년이나 배웠대. “


“으허어어어어어엉.”


옆에 있는 재석이 형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호제야, 난 지난달 대회에서 예선 탈락했었어. “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가 보다.

 

”으허어어어어어어어엉 나 펜싱 안 할 거야. 으허어어아으아아앙.”


“호제야, 절대적인 물리적 시간이 필요해. 호제는 햇수로는 3년 차지만, 형은 4년 정도를 꼬박 했대. 호제도 물리적 시간을 채우면 충분히 더 해낼 수 있어. “


”내가 1년 더 해도, 저 형도 1년 더 하니까 안 똑같아지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앙아앙앙앙.“


”(헙!) 촘촘하게 채우면 되지. 성장하는 시기는 모두 다르잖아. “


 


 


호제는 색종이로 팽이를 만들며 마음을 달랬다. 화정 선생님이 호제에게 다가왔다. 화정 선생님의 겨드랑이 품에 꼭 안겨 또다시 서럽게 울기시작했다. 손에는 접다만 팽이가 꼭 쥐어져 있었다.

 

“으어어어아아아앙 흑흑흑 으어아앙 아무도 없었어. 으아아아앙 흑흑흑.“


호제에게 나는 이어 말했다.


”호제야, 경기장에 올라간 순간 결국 호제가 해야 해. 칼을 찌르는 것도 호제야. 코치 선생님이 계신다고 해도 경기를 대신해줄 수 없어. 결국엔 호제가 해야 해. 오늘 충분히 호제는 스스로 잘 해냈어. 지난달보다 등수도 올랐어! 경기력도 좋아졌고. 충분히 늘었어.”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 화정 선생님이 호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잠시 울음을 멈추고 호제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편에 함께 경기했던 선수가 웃으며 엄마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저 형아 아직 안 갔어. 으아아아하아하아하아하아항. 왜 안 가는 거야. 으하하아아아아아앙앙어엉엉.“


“시합 더 하고 가야지.”


“더 한다고?! 으아아아앙꺽꺽 으항아아아아앙.“



화정 선생님이 상대선수가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려 시야를 막아줬다. 호제는 울음을 그치고 팽이를 접으며 화정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결국 화정 선생님과 손가락을 걸고 열심히 준비해 7월 대회에 나가기로 약속했다. 인증샷도 찍었다. 그제야 식음전폐를 중단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기분이 풀린 뒤, 체육관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대회 날 아침, 호제는 거실 매트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엄마, 나 오늘 7-8등 할 거야.”라며 스스로 목표를 세웠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기면 목표를 달성하는 거였다.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경기라 생각해 패배의 쓴맛은 더 강렬했다.


엄마가 바라본 호제는 경기에서 졌지만 한 달 사이 쑥 컸다. 먼저 경기력이다. 5월 경기에서는 1승 4패로 아슬아슬하게 본선에 진출했다. 6월 경기에서는 3승 2패 11등으로 16강에 올랐다. 호제 아빠는 이번에 영상으로만 호제 경기를 접했다. 먼저 발을 내밀어 공격하는 모습이 지난달보다 늘었다며 그것만으로도 뿌듯하다고 얘기했다.


“먼저 발을 내밀더라. 지난달에는 뒤로 뒤로 갔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생각을 했어?”


“아빠가 이순신 얘기해 줬잖아 (나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아빠와 호제가 얘기를 했나 보다. Y. 좋았어. 앞으로도 이렇게 잘 부탁해.).”


 


 


두 번째는 관계 차원이다. 친구를 응원할 줄 아는 넉넉함이 생겼다. 8강 진출이 무산된 후, 4강에 올라간 친구에게 편지를 써줘야겠다며 색종이와 연필을 내게 달라고 말했다. 색종이에 “태이야, 이겨라!”라고 적은 뒤, 계단으로 올라가 선전지를 뿌리듯 응원 종이를 내려, 친구 머리에 스치게 했다. 기차 시간 때문에 친구의 마지막 경기는 못 봤다. 나올 때, 친구를 꼭 안으며 “넌 할 수 있을 거야”라며 넉넉한 응원을 건넸다. 지난달 대회에서는 대회 끝나고도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던 호제였는데, 응원하는 마음이 성큼 컸다. 이건 클럽 내 5학년 준호형이 연습경기 때 호제에게 외쳤던 “호제야! 넌 할 수 있어! 너의 잠재력을 믿어!”라고 외쳐줬던 잊지 못할 순간을 호제도 친구에게 남긴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두리번두리번거리던 호제가 하준이 형에게 다가갔을 때, 하준이 형의 토닥이는 손길을 느꼈을 거다. 2학년 형의 따뜻한 위로와 돌봄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을 거다.


 


역으로 이동하려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호제가 대뜸 “루카스형 잘하더라. 친해지고 싶었어. 루카스형한테 영어로 말해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태도가 좋은 사람을 발견하는 눈, 새로운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는 용기와 마음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쉽게도 체육관을 나온 후라 원정레슨을 가던가, 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보자고 얘기하고 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회복탄력성이다. 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하여 경기장을 신나게 놀러 다녔다. 형, 누나, 동생들과 놀기도 하고, 친구의 장갑도 찾으러 가고, 8강 나가는 친구들과 같이 이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차에서 내리며 “오늘 경기 모두 다 재밌었어!!”라고 말하는 호제의 회복력에 감탄했다. 레슨 중에 선생님께 지면 울면서 클럽을 뛰쳐나가 경기복 차림의 선생님이 계단을 다다다다 따라내려 가거나, 이긴 상대를 으르렁거리며 보던 지난날이 스쳤다.


 


 


호제야, 이 날의 경험이 오롯이 호제 몸, 마음, 머리에 남았을 거야. 많이 무서웠어? 그랬을 수 있어. 펜싱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앞으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상대는 든든한 백그라운드, 수많은 조력자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느낄 순간들이 있을 거야. 분명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성장했는데, 과정과 결과를 인정받는 건 포디움에 올라간 사람뿐인 걸 지켜봐야 하는 나날도 여럿 있을 거야.


그럴 때 오늘을 떠올려보자. 무서웠지만 끝까지 호제 스스로 판단하며 물러나지 않고, 나아갔던 약 6분 30초의 시간. 상대가 있는 경쟁이라도 결국 마지막은 나와의 싸움이라는 거를 알게 됐을 시간. 호제가 연습했던 시간을 믿고, 해보고 싶었던 거 마음껏 해보고 결과에 상관없이 후련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꺾지 않고 운동을 시작하고, 기다렸던 대회에 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과를 마무리 지은 아름다운 호제. ‘아름’은 옛말로 ‘나’라는 뜻이

있대. 나답다는 물아일치의 경지가 현재의 말로 바뀌었다는 학설이 있다고 해. 나다움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호제야,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주욱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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