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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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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Feb 01. 2023

패배: 패배의 맛과 계단식 성장


패배(敗北): 1. 겨루어서 짐. 2. 싸움에 져서 달아남. 
성장(成長): 1.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 2.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점점 커짐.



레고방 옆에 펜싱클럽이 생겼다. 투명한 유리문으로 초등학생들이 펜싱 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제와 나는 펜싱클럽 문 앞에 서서 펜싱을 잠시 지켜봤다. 2020 도쿄올림픽 펜싱 경기를 본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펜싱을 눈앞에서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이 날 이후로 호제의 조르기가 시작됐다. 펜싱을 너무 배우고 싶단다. 계속하면 안 되냐고 묻는다. 일주일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일주일 뒤 레고방을 다시 찾았다. 키가 190cm는 족히 돼 보이는 남자 1분과 또 다른 남자 1분이 포스터를 문 옆에 붙이고 있었다. (호제는 키 큰 분이 BTS의 진을 닮았다고 했다.) 포스터에는 “키즈 펜싱!” 개설이 적혀 있었다. 장비도 무료 대여! 올림픽 할인가!


호제의 조름이 심상치 않아 다시 얘기를 나눴다. 시작하면 무조건 1년 이상을 해야 한다는 약속을 하고, 펜싱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새 1년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합에 지면, 울며 뛰쳐나가던 6세는 이제 울지 않고 분을 삭일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집에서는 아직도 지면 분해서 운다. 어느 날, 호제가 말했다.


“가을이에게 몇 개월 째 계속 지고 있어.”

“아 그래? 그럴 수 있지. 호제는 지금 실력을 쌓아가는 중이 아닐까?”라고 나는 답했다.


간혹 “나 오늘 가을이에게 이겼어!”라는 소식을 전했지만, 2-3번 정도였다.




초등학생 남매가 새로 들어왔다. 이날 호제가 누나에게 시합을 이겼다. 퇴근한 나에게 호제는 말했다.


“오늘 누나한테 시합을 이겨서 내가 펜싱에서 잘하는 부분을 발견했어.”

“오! 축하해!!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




하지만 며칠 뒤, 말랑 할머니에게 펜싱 수업 후 의기소침했던 호제의 모습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가 하원하러 펜싱클럽에 들어갔을 때부터 호제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없었다고만 얘기하고.


호제는 집에 와서 씻고 나와 거실 큰 창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워, 말랑 할머니에게 우유를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평소와 다르게 말도 줄고, 침잠한 느낌이라 말랑 할머니는 다시 호제에게 물었다.


“호제야, 괜찮아? 펜싱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 오늘 또 졌어. 내일 축구 가서 잘할 생각을 하며, 위로하고 있어.”


몇 주 뒤, 펜싱클럽 원비를 결제하러 방문해 호제가 몇 개월 째 지고 있어 속상해한다는 이야기를 펜싱 원장님과 나눴다. 원장님은 아직 아이들이 어려 자기가 쓰는 기술만 쓰고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하면, 호제는 가위만 내고 가을이는 주먹만 내는 거예요. 자기 하는 것만 하다 보니 호제가 지게 돼요. 아직은 어려서 그래요.”




스스로 위로하는 호제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어! 는 너무 뻔한 말 같고, 지금까지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이길거야는 너무 막연하고. 전략/전술을 써보라고!라고 얘기하기에는 전략/전술을 내가 모르고. 안 쓰고 싶어서 안 썼겠냐 싶기도 하고. 펜싱만 꼭 집어 얘기하면 못하고 있는 상황을 콕 집어 얘기하는 것 같고.


계단식 성장곡선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지금 호제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왜 힘들지, 성장이란 건 언제 일어날지를.


무심하게 호제에게 질문을 툭 던졌다.


“호제야, 성장은 어떻게 일~어~나~~~ 게?”

성장은 직선으로 주우우우욱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일어난대. 이렇게!”


화이트보드에 우상향 직선과 계단을 그렸다. 그리고 호제에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힘든 부분이 어딜까?

한 번 표시해 줄래?”


호제는 펜을 들고 점핑하기를 앞둔 곳에 펜을 동글동글 돌리며 표시했다.


“오! 그래 여기서 힘듦을 느끼겠다. 여기가 힘듦의 시작점(starting point)이라고 볼 수 있어.



이때부터 위로 점프하기 전까지 계속 힘듦을 느낄 수 있어. 만날 제자리인 것 같고. 시합에 지는 것 같고.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이 구간을 지나면 위로 슝! 올라가는 때가 와. 그러다가 또다시 쌓아 나아가는 평평한 구간이 나오고. 이걸 반복하는 거야.


누구나 그래.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그래서 호제가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대로 안 된다 싶을 때는 이 계단을 생각해 봐.


계단을 올라가는 경험은 매우 짜릿할 거야!”


성장하는 기쁨을 뿌듯함을 언어로 전달하기에는 내 표현력에 한계가 있었다.




“어떤 건 금방 점프하기도 하지만, 어떤 건 어어어어엄청 오래 걸리기도 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치, 잘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성장 속도와 시기는 모두 달라.”


호제가 지금 느끼고 있을 답답함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건 시간과 노력은 호제의 편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해보자고 손을 건네고 싶었다.


“엄마 근력운동할 때 “슨~생~님”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고 했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해서 5kg, 10kg 중량을 늘려 무거운 것도 번쩍 들 거야. 호제도 번쩍 들고! 그러기 위해선 나도 이 평평한 구간을 지나가야겠지?!“


“엄마, 100kg 해! 1톤 해!!”

“(허업!!) 그.. 그.. 그래. 노오력 해볼게.”

(이로써 나는 100kg을 드는 득근녀가 되기로!)


“그러려면 뭐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한 대. 엄마도 꾸준히 해볼 거야!! 호제도 이 구간 잘 지나가 보자!”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대신해줄 수도, 대신 아파할 수도 없기에 함께 인내하며 뚜벅뚜벅 걷는 일이지 않을까.




“…….나 오늘 또 졌어.
내일 축구 가서 잘할 생각을 하며,
위로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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